[루포] (89) 大邱(대구) 남산본당
準主敎座 구실하는 곳
35년간에 이사는 세 번하고
日帝末엔 佛人神父 軟禁所
발행일1961-12-10 [제306호, 3면]
대구 시내 본당들 중에 주교좌성당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본당설정 35주년 되는 남산동(南山洞)의 『성 요셉성당』은 종탑 위에 사복음사가(四福音史家)들의 초랍을 세워둔 이채 띈 건물이다.
주교관과 인접해 있어 주교좌본당은 아니면서도 준주교좌 성당이라 할까? 주교관으로 오신 손님신부들의 미사가 있어 어떤 날에는 성당 안 세대의 제단에서 각각 2·3대씩의 미사 봉헌이 있다.
주일날 미사는 6시반부터 오전 중에 세대 미사가 드려지고 있다.
1926년 5월30일에 본당이 설정되어 그 당시 주교관구 내에 있던 『명도회관』(明道會館)을 성당으로 꾸미고 계산동의 주교좌본당에서 구역을 나눠받아 첫 본당신부로서 <바오로> 석(石鍾寬) 신부가 부임한 이래 <루이.델랑> 남(南) <아오스딩.으제니오.빠이에> (方) <요셉> 장(張炳華) <바스칼> 강(姜贊亨) <이나시오> 이(李性萬) 신부 등 역대 본당신부의 시대를 지나 현 본당주임 <벨라도> 서(徐廷道) 부교구장을 뫼시기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성당이사를 세 번이나 하게된 기록을 갖고있다.
즉 임시성당이었던 「명도회관」에서 <빠이에> 신부시대에 대명동(大明洞=現曉星中學校舍)의 신축 새성당으로 옮겼고 그 후 태평양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1945년에는 성당건물과 구내 전체가 「프랑스」인 신부님의 『집단연금수용소』로 되어 교우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성당은 다시 주교관구 내 옛본당의 강당(現 가톨릭시보 印刷局) 건물로 옮겨야 했던 것이며, 8·15 조국광복 후대 명동의 본성당으로 돌아가서 약 7년 후인 1952년 그 자리에서 『효성여자대학』을 발족하게 됨에따라 또 현재의 위치에 성당을 새로 짓고 이사를 해야했던 것이다.
현재 신자의 총 수는 3천8백명이지만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기에 본당살림에 애로가 많다. 변두리 지대가 되어 시내에서 사업하던 사람들이 실패해서 집값 헐한 곳으로 밀려나와 살게되는 곳이 이 본당의 관할지역이다. 그래서 2배 이상이나 더 늘어난 명년 교무금은 1년분을 한꺼번에 받는 재래식 수금방법을 쓰지 않고 「카아드」를 만들어 매달 분납(分納)하도록 하는 방법을 써보게 됐다고 말씀하시는 본당신부님은 『명년에는 성당수리도 해야겠으며 대문도 옮겼으면 좋겠는데 교우들 생활은 말할 것이 못되고……』 걱정한다. 글나 순박한 신앙심의 소유자들인 이 본당 교우들은 성사 잘 받고 열심하여 매일 아침 미사참례자가 150명 이상이다.
신부님이 신자사목에 주력하는 부분은 『교회 예전과 교리지식 향상』이지만 교리 강좌시간을 마련해 놓았어도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없는 탓인지 효과를 못 올리고 있다.
연극(演劇) 잘하는 것으로 이름 높았던 청년회는 이젠 그 조직도 없고 평신자의 단체로는 「레지오·마리에」가 여자 2개 「쁘레시디움」과 소년 소녀 2개 「쁘레시디움」이 있고 「성모회」 「연령회」 남녀중·고등학생회 「성가합창단」 「회장단」 등이 있으며 본당 경제문제를 의론하는 「재정위원회」가 있다.
부속 사업으로는 「성모유치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원아(園兒)는 70명 수녀(바오로회) 두 분과 부모 한 명이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