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33) 베니 아베스 주변의 싸움 ①
발행일1962-05-20 [제327호, 4면]
1902년 동안에 레니요오 대위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벨바라」까지 갔다. 이것은 「베니 아베스」가 있는 사우라와 일찌기 후꼬오가 모록코 탐험여행에서 최남단까지 갔을때 정찰한 드라아강 도중에 있는 대야자림이었다. 「다벨바라」는 모록코이 공격대를 감시하며 중앙 사하라의 오아시스를 보호하는데 다시없는 감시소였다. 대위는 그곳에 작은 수비대를 놓으려고 생각했다.
후꼬오도 그렇게 하도록 그를 격려하고 있다. 모록코의 체험이 그에게 알으켜준 것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실떼르 유혈을 보지 않고 「아벨바라」에 들어가는 것이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그곳에 새로운 수비대를 설치하려면 방비된 어떤 옛마을을 그곳 정주민에게 빌려줌으로써 충분할 것이다. 알제의 토민국의 지휘관인 라크로와 소좌와 1년전부터 오아시스 지구의 지휘관인 라페티느 소좌의 의견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나 알제리아 총독부는 이여 반대했다. 외교적 분규를 무서워했다. 이리하여 사우라의 여러 오아시스는 사막에 상대하는 제일선으로 그쳤다.
1903년 사이에 정세가 돌연히 역전했다. 두번이나 되풀이 하여 아라비아인의 공격대가 「베니 아베스」 근변의 토민을 습격했다. 그는 약탈하며 가축을 끌고가는 것으로 만족했으나 또다시 치안이 물란해진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르르 수사는 가난한 은둔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의 작은 식민지를 세우기 위하여 모록코를 여행할 계획을 좀체로 버리지 안았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베니 아베스」로 온 것이며 항상 또한번 정복자로서 혹은 탐험가로서가 아니라 천주의 사람으로서 중간지대로 갈 예정이었다. 그는 다만 홀로 무장도 안하고 출발하여 무방비로 학살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날 저녁에 순교자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오늘을 살 것…』
이와 꼭같은 결심을 한다는 것은 우선 그가 자기를 따라오겠다고 생각하는 동지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동지들이 오지않으므로 그들을 불러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눈의 성모수도원과 스타우엘리의 트라피스트수도자들이 그와 꼭같은 길을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않는지를 물어보았다. 이 두 수도원의 원장들도 전연 편협한 당파심에서 그에게 단대한 것은 아니나 그의 동지가 될 사람들을 위하며 그 고심극기에 대한 끝없는 갈말을 두려워했다.
그 한사람은 신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놀라고 있는 다만 한가지 일은 그가 기적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적 이외에 지상에서 이와같은 성덕을 본 일은 없읍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그의 신중성에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가 행하고 있는 고심극기는 처음 온 사람에게는 즉시 실망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밖에 그가 자기가 행하며 그의 제자들에게 시키려고 생각하고 있는 정신의 기장은 도저히 인간의 행할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므로 나는 그가 제자를 과도한 고심극기로서 죽이기 전에 이 정신의 과도의 긴장으로 미치게 하지나 않나 하고 두려워 합니다.』
같은 해 5월 게랑 주교와 뷔야아르라는 또한 사람이 백의 선교회 신부가 「베니 아네스」를 방문했다.
5월 31일 성신강림첨례날 게랑 주교는 뷔야아르 신부와 드 후꼬오 신부와 함께 은둔소에서 교회의 책임을 하고 있는 오두막집 속에서 장엄미사를 올렸다. 이 오아시스에서는 이와같은 장엄한 의식은 일찌기 없던 일이었다.
샤르르 수사는 이 방문객에게 벌써 이년동안이나 하지 못했던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는 수첩에다 게랑 주교의 조언을 일일이 공들여 적어놓았다.
후꼬오가 이렇게 소중히 여긴 존경과 복종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거칠고 솔직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게랑주교가 출발한 다음날 이번에는 다른 방문객이 두 사람 즉 신덕이 깊은 회교도가 사랑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즉시 샤르르 수사는 게랑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다휠라렛트에서 온 두 사람의 사나이 두 사람의 은수자의 장시간 방문 그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는 당신이 다휠라렛트에가 본 일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읍니다. 아니 언제고 오시게 되겠지요 「마르하바」는 도보로 여행을 하십니까. 아니 나귀로… 회교의 은수자들이 한 이와같은 질문이 대단히 나를 반성하게 해주었읍니다. 그들은 나귀를 끌고 있으면서 도보로 걸었읍니다.
<그리스도교도는 단 한사람의 그리스도이다> 우리들은 항상 가난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마호멛의 제자인 것이다. 나는 우리 형제인 사도들을 모범으로 하려고 생각합니다.』
자기포기와 청빈만이 힘으로도 부로도 웅변으로도 불가능한 일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진실한 길을 열수가 있다. 가지를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천주를 긍정할 수가 있다. 샤르르 드 후꼬오의 전생애는 그가 회개한 이래 이것을 철저히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움직이고 있다.
같은해 3월과 6월에 「부우 아마마」전쟁의 옛친구인 라페리이느가 「베니 아베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애정을 지속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말로 그들의 우정은 더한층 긴밀하게 되며 완전히 친하게 되려고 한다. 라페리느는 오아시스지역의 총사령관이 된 이래로 대단히 광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드라아강을 향하여 대서양간까지 프랑스의 침입을 장려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서는 그 부하 레니요오와 같이 그도 정부에서 견제 당하고 있다. 그느 사하라의 한편에서 저편까지 가보고 싶었다.
이 방면에서는 그의 희망은 실현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여러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모록코의 국경에서는 이미 사건이 발발하고 있었다. 1903년 5월 31일 게랑 주교가 마침 「베니 아베스」에서 성신상림첨례를 지내고 있던날 「휘기그」 의 제부족이 순시관으로서 온 총독의 호위를 국경부근에서 습격했다. 공격대는 격퇴되었으나 이들은 우선 즈스화나강에 연해있는 큰 모래언덕의 북부에서 이러한 여러 전투의 전구곡이 되었다. 이로부터 3일후 「베니 아베스」 지역도 돌연 소전투에 휩쓸렸다. 16일 2백명의 「벨라벨」족이 「아드라아르」의 알제리아 저격병의 분견대를 습격하여 50명 가운데 22명을 죽였다. 그 정보가 「베니 아베스」로 가자 즉시 레니오 대장은 반격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낙타병과 기병 80명을 인솔하고 타벨바라로 급히 떠났다.
보든 오아시스의 불안은 절정에 달했다. 이 전투 뉴스는 「베니 아베스」를 동요시켰다. 이미 이 순간에 문을 닫치고 평안히 있는 은둔소 같은 것이 있을 수는 없었다. 신부는 오로지 부상자들을 돌보러 갈 생각으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당장에 타기트로 가겠다는 허가를 얻었다. 그리고 말과 박차와 뮤룬느(頭巾外套)를 빌렸다. 일시라도 빨리 가려고 기병의 모습을 하고 길에서 너머질 각오까지도 하고 있는 이 은수자를 보고 미친짓이라고 웨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 아라브 사무국의 대위는 대답하고 있다.
『그는 능히 통과할 수 있읍니다. 그는 말은 안하지만 저 사람은 무기도 없이 지금 봉기하고 있는 모든 지방을 횡단할 수가 있읍니다. 아무도 그에게 해를 끼지치는 않을 것 입니다. 그는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무기 없이 안내역을 하는 토민 한사람과 출발했다. 도중에서 그는 기병 한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드슈비엘 대장이 부상자를 위해서 신부를 청하기 위해서 보낸 자였다.
「타깃트」와 「베니 아베스」 사이 1백20십키로를 달리는데 꼭 일주야 걸렸다.
신부는 대장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외인부대의 병사들은 본체만체 했다. 병사들은 그에게 냉정한 태도를 표시했다. 그러나 신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종교와 신부에 관해서 아무런 관계도 없던 이 48명의 고참병들에게 그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미친 영향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읍니다.』라고 드슈스비엘은 그후에 기록하고 있다.
『나는 신부와 그 새로운 신자들이 접촉하는 장소에는 있지 않았읍니다. 그가 도착하는 날 그에게 물었읍니다. <신부님 부상자들이 당신을 환영했읍니까>하고.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검은 눈동자에 어린이 같은 미소를 띄우면서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좀 있으면 친구가 되겠지만 아뭏든 나는 그들 옆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 대단히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했읍니다.』
『사실 그는 친절과 끊임없는 헌신과 애교로서 그들을 정복하는데 그다지 시간은 걸리지 않았읍니다. 그가 부상자의 방에 들어가면 그들은 신주를 서로 끌었읍니다. 맨먼저 신부를 가로챈 사람은 자기 침대(풀로만든 간단한 것) 옆에다 앉치고는 다른 사람들이 불평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되도록이면 오래 붙잡고 있었읍니다. 신부는 피로한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들의 편지를 써주고 용기를 돋아주고 낮은 소리로 얘기도 하고 차츰차츰 종교에 대한 얘기도 하는 것이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