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14) 聖(성)스러운 反逆(반역) ①
미셀·까루우즈 原著
발행일1961-12-10 [제306호, 4면]
「모록코」에서 돌아오자 <말도세 아비 세루르>는 자기의 봉급과 당연히 받아야 할 상금을 받았다. 그는 돈의 대부분을 젊어서부터 정열을 바쳐온 연금술에 썼다. 그러나 수개월 후에 그는 수은의 증기에 중독되어 죽어버렸다. 그의 여행 동지의 운명은 이와 달랐다.
1884년 5월26일 <샤를르.드.후꼬오>는 「알제리아」에 돌아와 <막크.카아시>는 그를 열광적으로 맞아주었으며 신문지상에 승리의 공포를 발표했다. 1년 동안에 <후꼬오>는 매우 변했다.
얼굴은 말라서 쭈굴쭈굴했다. 눈은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변해버린 것은 아니다.
표랑하는 유데인의 낡은 옷을 벗어버린 다음 그는 성 <바오로>가 말씀하신 『헌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쾌락에 대한 옛날의 열광을 또다시 찾아냈다. 6월7일. 그는 「프랑스」행의 배에 탓다.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여행에 대한 간단한 연락사항을 지리학 협회의 비서관장 <모노왈>씨에게 보냈다.
<모노왈>씨는 열성을 다해서 그에게 축사를 하였으며 교외의 「세에브르」에 사는 부회장인 <듀베리에>씨에게 안내해주었다. <뮤베리에>씨는 <막크.카아시>나 <모노왈>씨에게 지지 않는 열성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후에 열린 지리학협회의 최초의 회의에서 부회장은 다음과같이 선언하였다.
『<드.후꼬오>씨의 여행은 아프리카에 있어서 탐혐여행의 중요성을 전부 갖추고 있읍니다. 모록코의 내부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읍니다. …… 이것은 지리학을 위해서의 참된 정복인 것입니다』
<듀베리에>는 지리학의 대가였다.
「생.시몬」 주의자의 아들로서 1840년에 옛날 귀족의 가문에 태여난 그는 실연으로 인하여 프랑스를 떠났던 일이 있었다. 그는 <막크.카아시>를 믿고 그를 본받아서 18세 때에 단신으로 사하라로 떠났다.
그는 이 여행에서 자칫하면 살해당할번 한 위기를 겪고 2년동안의 여행에서 그곳의 풍부한 자료를 모아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중병에 걸려 몇 달 동안은 기억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어려움을 돌바주고 그에게 「레종 돈에르」의 훈장을 수상해 준 <봐르니에> 박사는 그의 노오트를 모아서 『북방의 투아레그인』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할 것을 인수했다.
이 일은 그에게 커다란 고충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세계적 영예를 얻었던 것이다. 70년의 전쟁이 일어나서 그는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해방되자 파리로 돌아와 대단히 젊은 나이로 지리학협회 부회장이 되었다. 이만큼 많은 시련을 겪고 성공을 거둔 그 당시였건만 그는 오매불망하던 유명한 <앙황탕> 목사의 딸 <훼리시태>를 아내로 삼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지속했다. 그러나 83년에 <헤리시테>는 죽고 그는 영원한 비탄 속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명예까지도 고충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기와 학식은 칭찬하지만 그가 「투아레그」인의 친구에 대해서 단언하는 것을 전연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친구들을 고귀하고 기사적인 전사라고 생각하고,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정신으로 그들을 대하도록 원했다.
그러나 「투아레그」인은 잔인하고 악질적인 강도라는 평판이 너무도 깊게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는 세계의 지리학자나 민첩한 실업가들보다 훨씬 가까이서 그들을 보았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로맨티즘을 웃고있었다.
<튜베리에>에게 있어서는 <후꼬오> 의 방문은 큰 즐거움과 위안이 되었다. 그들은 옛날의 그리운 <막크.카아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듀베리에>는 <후꼬오>가 그의 무모한 모록코 여행의 극적인 모든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 자기 자신의 청년시대가 다시 사라난듯 싶었다. 그는 매우 즐거워했다.
<시디.에드리스.부람>, <벨.캇셈> 등을 만나보고온 사람에게는 <후꼬오>가 「투알레그」인의 수령들과 어떠한 우정을 맺고 있었는지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후꼬오>가 「라제르」와 「호가아르」의 신비적인 민중에 관한 <두베리에>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이날 「세에브르」의 별장에서 베일을 쓴 사나이의 위대한 모습이 <후꼬오>의 가슴에 깊이 깊이 아로삭여졌었다. 그의 모습은 아무말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운명은 거기에 있었으나 운명은 그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었다.
「호가아르」에의 길은 똑바른 길은 아니었다.
이 방문이 있던 다음날 <샤르르>는 파리를 떠나 누이동생과 <모와테시>에 집의 사람들을 만나보기 위하여 「지롱드」의 「튜캐」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여름방학을 지낼 작정이었다.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친절하게 또는 자랑스럽게 그를 맞아들였다. <샤르르>는 또다시 사촌누이 <마리>와 회화를 서로 주고 받았다.
『당신이 「튜케」에서 대단히 친절하였기 때문에 나는 십년 동안이나 잊어버리고 있던 선(善)이라는 것을 또다시 알았으며 존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라고 <후꼬오>는 그 후에 편지에 써서 보냈다.
참된 신비는 모록코 여행을 한 후의 일이며 돌연히 그 말이 생명을 회복했던 것이다. 「난시」와 「소뮤르」, 혹은 「뽕.타.뭇송」의 시대는 그것은 재와 먼지에 파묻혀있었다.
지금 그의 말은 본래 있던 투명성을 회복했으며 <샤르르>는 그것이 어떠한 신적, 인간적 생명계를 의미하고 있는가를 알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변해감을 느꼈다.
10월 초순에 그는 모록코에 관한 작품을 모으기 위하여 알제리아로 돌아왔다. 이것은 그의 모든 시간을 제공해야 하는 거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대단히 진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 어떤 지리학자의 딸인 <디이들>양과 친교가 있었다. 신교도로 태여난 그 여자만 여러 가지로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 여인은 반짝이는 눈을 가졌으며 그의 얼굴은 그 시대의 우아의 상중이었던 세계의 커다란 인공사마귀가 있었다.
<후꼬오> 자신도 이제는 마르지도 쇠약하지도 않았었다. 그는 또 뚱뚱해졌으며 몸단장에도 마음을 쓰기 시작해서 수염도 최신 유행으로 길렀고 그의 눈초리는 또다시 부드럽게 되었다. <후꼬오>는 그를 회심시키려고 꿈꾸고 있는 <티이들>양에게 상당히 맘에들게 되었다. 그 자신도 마음이 그 여인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계획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네스> 숙모는 이 결혼에 반대의견을 표시하고 <마리.드봉디>도 또 종형제에게 그것을 단념하도록 했다. 이것은 대단한 무분별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별안간 예측도 못할 반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가 어떤 강한 성격이 될 수 있는가를 알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큰 저항은 없이 양보했다. 아마 자기 자신도 생각하던 것 보다는 열중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 새로운 길이 자기를 어디로 인도하는 지를 잘 알지는 못했으나 <마리>가 참된 길을 지시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이 결혼에서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었읍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를 구해주었던 것입니다』라고 그는 어떤날 <마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때에 <마리.드.봉디이>는 <샤르르.드.후꼬오>의 생애에서 <부우.이마마>와 같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12월말에 <샤르르>는 누이동생과 <레니몽.드.부릭크>씨와의 결혼 때문에 프랑스에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