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性人(지성인) 상대할 講座(강좌)
그리운 大邱
발행일1961-12-17 [제307호, 1면]
1959년 7월7일부터 동 11일까지 신부들의 피정신공이 성신대학에 있었다. 나는 20여 년만에 처음으로 피정을 하였다. 전에 출판부에 있을 때에는 피정 중 강론이나 들었을 뿐 기타의 시간을 원고 쓰기, 원고 검열, 마지막 교정 등에 빼앗겼던 것이다.
피정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나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지금은 전교가 한창 잘되는 때이니 어떤 도시에든지 들어가 교리 강좌를 열면 몇백명 젊은 이들이 모여들 것은 의심 없다는 것. 「미리내」엔 신부가 필요 없으니 먼저와 있던 대전 성방지거회 배신부님이 나한테 밀려서 20리상 거의 「천리」라는 공소에 계시니 양처를 관리하실 수 있고, 그렇게 못 된다면 「천리」는 용인읍에서 10리 밖에 안 되니 용인에로 떼여붙여도 좋은 것, 나는 어디 다니기를 싫어하는 성질인지라 이대로 「미리내」에 돌아가면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니 아주 피정 끝에 일을 서둘러 보기는 할 것-
동 12일에는 대구시로 갔다. 저녁을 먹은 다음 서부감목께 내가 대구에 와서 외교인 전교에만 주력한다면 어떻겠느냐고 문의하였더니 곧 찬성하시면서 평의회를 긴급 소집하신다. 이 회의의 결과로 만일, 그 때 「오지리」에 계시던 서주교님께 문의하기로 결정이 난다면 나는 대구를 사양하고 다음날 부산으로 향하였을 것이다. 부산이 안 되면 광주, 광주가 안 되면 전주, 거기서 안 되면 대전, 거기서 안 되면 춘천, 거기서 안 되면 청주…… 여하간 도시마다 지식층 외교인 전교에만 주력하는 신부가 하나씩 필요한 판국인지라 어디서든지 걸릴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대구를 먼저 택한 것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대구 시민은 기백이 있고 민도가 높고 또 매일신문, 대건중고등, 효성여중고, 효성여대 등 배경이 좋기 때문이다. 대구에 가톨릭이 잘 보급되면 인근 각 읍내에도 영향이 끼쳐질 것은 필연지세다.
회의는 곧 『대환영이라』고 끝났다. 다음날 서울행 급행열차 속에서 나는 교리강좌의 설계를 꾸몃다. 서울서 매 교리강좌에 9백명 내지 1천명씩 모여들었다. 대구시는 서울의 약 3분지1쯤 된 즉 대구 교리강좌에는 3백명쯤은 모이리라. 먼저 주일 오후 강좌를 열고 한 달 후에는 「토요강좌」를 열고 또 한 달 후에는 「금요강좌」를 열고 또 한 달 후에는 「목요강좌」를 열고…
이렇게 연중무휴로 돌린다. 수요일에는 대건중고등, 화요이에는 효성여중고에 나간다. 이런 학교에서는 학생이 상대가 아니라 교사를 상대로 한다. 가톨릭교리 강의를 시작한다면 어떤 학교든지 7·8명의 교사들은 모일 것이다. 나는 전에 계성여중고에서 이렇게 하여 본 경험이 있는데 『우리 선생님들이 교리를 연구하신다』는 사실이 학생들에 큰 영향을 끼침을 알았다. 월요일에는 효성여대에 나간다. 이렇게 한 주일이 교리강좌로 꽉찬다. 이만하면 「미리내」서처럼 놀고 먹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상 4개의 공개 교리강좌를 연중무휴로 지금까지 끌고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가? 한 강좌가 4개월 걸린다. 1년이면 12개 강좌, 2년이면 24개의 강좌, 2년 반이면 28개 강좌이다. 매 강좌에 3백명씩 친다면 8·9천명 외교인들이 교리강의를 들었을 것이오, 만일 서울서 이상 설계대로 하였다면 약 2만5천명의 비가톨릭자들이 가톨릭교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맺어질 번한 「인연」 때문에 나는 「대구시」를 종종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 호강스러운 경향신문사 사장 노릇 보다는 대구시의 피곤한 교리강사 노릇을 감심으로 택하겠다. (1961·12월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