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祭館 窓门(사제관 창문)] 社會變遷(사회변천)과 「모랄」
10년만에 보는 거리 風景들
발행일1961-12-17 [제307호, 2면]
사회의 변천과 발달이 반드시 윤리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 한국생활에 처해있는 가톨릭자의 사명
아마 10년 전에 _국을 떠나 타향살이에서 금년에 돌아오는 사람이면 보고듣고 하는 가운데 놀랄 일이 많을 것이다.
위선 우뚝 솟은 현대 건물들이 아이구 이젠 한국도 건축이 꽤 발달되었구나 하는 감을 주는가 하면 여성들의 몸차림이 서양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뿐더러 도리어 소위 모오던 여성들의 그것보담 더하지나 않나 하는 느낌을 준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실험적으로 증명해야 고개를 숙이는 현대인일지라도 인간은 직각적 관찰(Intuition)로써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얼굴의 생김생김이나 말하는 태도로서 대략 그 사람의 개성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혼이 마주치는 여성들의 눈초리는 옛날과 정말 다르다. 생활의 억센 경쟁에 시달리고 갖은 인간의 꾀를 부린 경험의 결과인지 순진하고 수집어 하던 표정을 정말 엿볼 수 없는 정도이고 세계에서 자랑하는 한국 여성의 의상, 소박하나마 깨끗한 까만 치마에 흰 저고리는 엿볼 수 없게되었다.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의 태도 역시 옛날과는 딴판이다. 어른에게 드리는 예의는 우리들이 배워서 보담도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실천함으로서 뼈속에 스며있는 윤리였다. 선생님이 지나가든 어른이 지나가든 인사를 올리는 학생이 극히 드물고 이 극소수의 애들은 그렇게 예의를 채리는 행동을 아주 빨리 해치우고 무슨 호랑이나 따라 오는양 바쁘게 해버리는 것 같고 동료들의 눈치도 살피는 것 같다.
눈시울을 다듬지 않고 입시울에 빨간칠을 해 다니지 않으면 남들에게 웃음을 당하는 정도로 한국 부인네들이 진보한 모양이다. 옛날에는 돈이 없어도 선배이요 가정이 착하고 덕이 있는 자에게 존경을 드리고 예의를 채렸다. 돈이 많이 있으면 친우도 많고 존경도 받고 사회 지위도 올라가는 모양이다. 범죄인이라도 돈만 쓰면 무죄 석방이 되고 선거에도 돈을 내면 성공하고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믿고 있는 모양이다.
한꺼번에 돈이 쏟아져나오는 어떤 길이 있다고 할 때 방법이 어긋난다고 피하고 가난뱅이 살림을 하면 바보라 멍충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면 웃어른에게 예의를 채림으로서 동료들의 눈초리를 받고 여성다운 옷채림이나 몸가짐을 하면 남한태서 코웃음을 받고 양심을 지키느라고 부자의 길을 피한다고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 한국의 사회가 처란것이 옛날과 아주 반대로 되어 버렸다는 결론이다. 그 이유로서야 6·25 동란으로 가정파괴, 경제 생활의 도탄, 외래생활 양식과 주의사상의 범람…… 여러 가지 있겠지만 위선 당장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가 이쯤 변해버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현실을 그냥 그대로 그러려니 하고 무조건 그 속에 휩쓸려 들어가 될대로 되라는 운명론자들의 정신 상태가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아주 적합하고 자연적인 결과였다. 그래서 이미 서양서는 갈가먹고 낡아빠진 뼈가지 실존주의사상이 아직도 은연중 심중에 숨어있는상 싶다. 이런 정신상태의 조성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인간은 날때부터 독불장군으로 사막 은둔자로 뚝 떨어진 섬에서 혼자 살지 못하고 인간의 사회속에서 자라나고 인격을 연마케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격을 쌓올리는데 개인이 타고난 소질보담도 주위 환경에서 입는 영향이 굉장히 큰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으로 보아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회의 어떤 가치 혹은 사상이란 큰 물줄기에 개인의 바락이란 아주 힘드는 법이고 여간한 정신적 무기와 원측을 갖지 못하면 이 크고 힘찬 물줄기에 그냥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게 된다.
둘째 우리 한국은 국민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는 재래 종교란 것이 없다. 다만 있다면 종교라기 보담은 미개문명에 속하는 원시종교뿐 비컨데 바위틈에 가서 촛불을 켜고 밥을 채려 빈다는 종교표현에 불과하다. 그리고 불교라든가 유교가 재래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인도나 중국서 유래하고 수입된 종교이다. 그뿐 아니라 이들 외래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어떤 시기에 그것이 국왕이 받아들이고 국민들이 신봉하여 그 세력이 확대될 때 그 교직자들은 정치에 간섭을 하게되고 결국엔 수입 초기에 지니던 종교적 요소는 잃어버리고 당파싸움의 도구로 화해 버린 것이 26종교의 한국에서의 말로였다. 물론 민중이 불교나 유교를 신봉하여 실천에 옮긴이들이 많지만 그 종교자체가 이런 단계를 밟았기 때문에 대대로 내려가서 국민성에 어떤 종교적 양심이라든가 원측을 뿌리 깊이 더 주질 못했다. 이와같은 이유로서 우리 민족은 종교적 가치를 탐구하는 인간의 가장 숭엄한 기능을 만족시킬 종교가 부재했으니 가짜 대상으로 농락당하기가 쉬운 것이다. 사실 해방 후 겪고 나온 자취를 보더래도 그렇다. 이 이데오르기를 따랐다가 저 당파를 쫓았다가 우왕자왕 그냥 닥치는대로 사회 환경이 움직이는대로 몰려다니었던 것이 아닌가?
위에 말한 패륜적 색채가 많고 붕괴된 과도기에 볼 수 있는 한국사회가 이런 이유로서 부작용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한 의인이라도 있으면 화를 면케 해주겠다고 하신 옛날의 영적을 기도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해볼 것은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힘찬 사회물줄기라 하더래도 그것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막지 못할 종류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 그러냐 하면 그 한방울 한방울 물이 되는 개개인이 아무 줄 데 없는, 확고한 「이데오기」가 없는, 따라야 할 지침판을 갖지 못한, 종교의 양심이 없는 갈대 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확고 부동한 사상체계를 갖고 확실한 인생 코오스를 발견한 몇몇 분자가 뭉처서 그 이데오르기대로 살아나간다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오합지졸의 무리들과는 달라 그 생활 작전이 틀림없이 서 있을게고 수적으로 우세한 대중을 넉넉히 대항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 싸움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국민 대부분이 어떤 비뚤어진 길을 걸어 갈 때 우리 가톨릭은 가톨릭의 윤리도덕률을 그대로 지켜 나감으로써 썩어가는 주위 환경을 소금으로 저려 썩지 말게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는 비상한 희생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 희생은 가톨릭자에게는 가능하다. 또 가톨릭자만이 할 수 있다. 윤리를 지킴으로써, 남의 눈치를 받게 되고 코웃음을 당하고 어리석은 바보란 말을 들어도 해 나가야 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이 신념이 곧 확고한 원측, 틀림 없는 이데오르기 그리고 최고 가치를 끊임없이 찾고 있는 가장 존엄한 인간성을 만족시키는 종교 진리의 파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 한국사회의 오늘날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은 다만 가톨릭자 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