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90) 대구 대봉동본당
신자 倍加운동을 전개
6·25가 낳은 성당·신부는 셋방살이 했고
6년만에 11배 늘었어도
발행일1961-12-17 [제307호, 3면]
본당(本堂)으로서 정식 승격이 된 것은 1955년 11월3일이지만 이미 1949년 가을부터 <이나시오> 전(全碩在=現曉大學長) 신부님이 이곳에 계시면서 『효성여자 중고등학교』의 교장직을 맡아보았고, 6·25 전란 이후는 『효성중학교』 임시교사와 서울 바오로 수녀원 보육원의 일부가 이곳에서 피난사리를 하고 있는 한편 종군(從軍)신부님들이 이곳에 숙소를 정하고 있었던 관계로 본당처럼 알려지기는 이미 10년이 되는 대구 대봉동(大鳳洞 174번지)본당은 이젠 성당건물 크기로서는 서울 주교좌대성당 다음가는 큰 성당으로서 알려지고 있다.
『오랫만에 겨우 보좌신부님 한 분을 얻었다가 또 군대로 가버려서 신부님 혼자서 대단히 바쁘시겠읍니다』하는 기자의 인사에 <요왕> 최(崔炳선) 신부는 『당하는대로 하지요 별 수 있나요』 하면서 지난 11월28일부터 본당 관내의 16개 구역(區域)을 매일 차례로 방문하여 교리 찰고(察考)와 지도를 해주고 있는데 오늘도 방금 구역을 돌고 돌아온 길이라고 하였다. 이 본당은 대구시의 동남쪽 지역인 대봉동과 봉덕동(鳳德洞), 그리고 봉산동(鳳山洞) 일부와 대명동(大明洞) 일부를 관할구역으로 맡고 있는데 신자 총수는 3천5백명이다.
6년 전 본당 설정당시의 교우 총수는 불과 3백여 명이던 이 본당은 그동안 10배 이상의 증가라는 놀라운 발전이지만 본당 신부님이 이번 추기 판공성사 기간을 통하여 다시 강조하는 「못토」(標語)는 개개인의 신자들이 명년 이때까지 1년동안 꼭 한 사람의 외교인을 영세입교토록 하자는 『신자의 배가(倍加)』운동이다.
『그동안 성당 건축하는데만 정신을 다쏟아 본당 조직에 대해서는 손이 미치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는 차근히 전교활동을 본격적으로 해야지요… 그러나 아직 사제관과 수녀원 신축문제가 숙제로 남아있읍니다…… 명년 봄에는 시작해 볼가 합니다. 그런데 신부사택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 본당에 처음와서 성당 구내에는 있을 집이 없고 도로 건너편 동리에서 셋방사리를 2년이나 하는 동안 이사를 세 번이나 했지요 이제 새 사제관이 신축되어 입주하게 되면 이래 저래 이사를 꼭 일곱번 하는 셈입니다. 그려…』
『이 본당에는 지식층 교우들이 많다는데 신자들의 분포(分布)는 어느 동(洞)이 많습니까?』
『교직원(敎職員)들이 많지요. 그러나 대개가 봉급생활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넉넉지 못합니다. 신자의 분포는 성당을 중심으로한 대봉동이 역시 많습니다』
지난 9월부터 『성가회』(聖家會) 수녀 세 분이 아동교리반 지도와 영세예비자의 교리교수를 담당하고 있는데 예비자 지도는 매일 오전·오후·저녁 세 차례 교수시간이 있고 첫 영성체 준비 아동지도는 목·금·토 3일, 학생교리반은 토요일과 주일에 지도하는데 고등학교 재학생은 신부님이 직접 교수를 담당하고 있다.
평신자의 사도직 단체는 지난 6월 말에 「레지오·마리에」 2개 「쁘레시디움」이 발족하였고 그밖에 신자들의 조직은 평의회, 학생회, 청년회, 「요셉회」 등이 있다.
본당 신부님이 항상 강조하는 말씀은 『파벌 없이 단결하자』는 일치협력(一致協力)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