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洲隨想(구주수상)] ⑦ 受驗者(수험자)의 주보 성모님?
數世紀(수세기)가 오가는 빠리의 앞뒷길
발행일1962-05-27 [제328호, 3면]
학생생활에서 시험만 없다면 얼만 즐거우랴. 국민학교 입학은 곧 이 시험지옥에의 입문이다. 국민교 1학년부터 시작하는 이 시험은 중·고등학교 대학을 거쳐 취직시험에 이르기까지 젊은 사람들의 큰 고민이다 물결처럼 닥쳐오는 시험파동과 싸우다가 보면 청춘은 다가고 만다.
프랑스의 학도들도 시험고에 시달리며 고민하기는 다른 어느나라 학생이나 매일 반이다. 더구나 시험 위주의 이 나라인지라 이 고민은 한층 더 심각하다. 이 고민하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성모님의 성상이 「빠리」 한 구석에 있다. 일테면 「시험의 주보이신 성모」상이다.
「생 미셀」이라고 하면 학생들의 거리로 이름난 곳이요, 「빠리」에서도 굴지의 대로(大路)다. 이 길은 「소르본느」를 위시해서 의과대학 등 많은 학교를 그 좌우로 끼고 있기 때문에 수업이 있는 날이면 진종일 학생들로 뒤끓는다. 교실은 텅텅비는 수가 있어도 이 길 양편 「까페」만은 젊은 남녀학생들로 미어져나갈 지경이다.
학생들은 차 한 「컾」 혹은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인생을 논하며 정치와 경제의 복잡한 문제를 다루어 열변을 토하는하 하면 멍하니 하늘을 우러러 우주의 신비 속을 부유하며 삼매경(三昧境)을 오락가락 하는 텁석나룻 노학생 쌍쌍이 앉아 사랑을 난발하는 전후파 학생들도 있다.
「빠리」의 학생생활은 「생 미셀」 대가에서 창조된다. 이 학생들에게 시험이라는 난관만 없으면 참말로 『청춘은 아름다워라』고 찬양의 소리가 절로 나올 판이다.
한편 이 화려하고 번잡한대로 첫머리에서 왼편 뒷골목을 들어가면 이 무슨 대죠냐. 한저가기 비할 데 없다. 천년묵은 수도원 복도처럼 고요하고 어둡다. 옛날 「빠리」가 아직 현대도시를 꿈도 못꾸던 아득한 옛날의 촌락 「모베르」가 바로 이 동리다. 이 뒷동리 한가운데 「생 세브렝」 성당이 있다. 기원6세기에 여기 살랐던 「세브렝」 성인의 이름이 곧 지금의 이 동리명이며 성당이름이다. 11세기에 본당성당으로 창건되어 「세에느」강 좌안(左岸) 넓은 지역을 관할했던 이 성당은 「빠리」 시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본당의 하나다.
「생 세브렝」 성당 주변은 「빠리」에 이런 곳이 있었더냐싶을만큼 수백년 묵은 집들이 둘러싸였고 또 「생 미셀」이 학생들의 중심가라고 하면 「생 세브렝」은 불량배(不良輩)의 소굴이다. 옛날 프랑소아 비온처럼 우리나라의 김삿갓 같이 방랑으로 한평생을 보낸 시인이 여기와서 살았고 단테 이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왔던 이 천년묵은 예 성당 주변은 이제 현대문화와는 멀리 버림받은 듯 「빠리」의 부랑자들이 즐겨 찾아드는 보금자리로 변했다.
이 성당 구내에는 아담한 옛정원이 있고 또 납골소(納骨所)가 있어 곰팡난 「빠리」만을 찾아다니는 기인들이 간혹 찾아온다. 납골소는 좁은 구내묘지를 정리하여 수만의 해골들을 한곳에 모아둔 곳이다. 그러나 이 성당 안에 예수 아기를 안은 성모상본이 있어 시험생의 주보로 추앙되며 많은 학생들에게 낙제의 고배를 면하여 주신다는 것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희망의 성모」로 학생간에 알려진 상본이 성당 한 모퉁이에 걸려있다. 시험기가 되면 많은 촛불이 그 앞에 봉헌된다. 시험을 앞에 두고 겁에 질린 학생들이 초 한자루를 사들고 이 성모님을 찾아와서 애걸하는 것이다. 『시험의 주보이신 성모님 나를 굽어보옵소서』 『낙제의 괴로움에서 나를 구하옵소서!』
시험에 성공한 학생은 다시 찾아와서 대리석으로 깎은 감사문을 벽에 붙여놓고 간다. 성모님이 언베투어 이런 「시험상담소」를 시작하셨는지 소상치 않으나 많은 감사비문 중에 1천8백년대의 날자가 있는 것을 보면 백년은 훨씬 넘은 듯 하다.
「생 미셀」대가의 「까페」에는 여전히 학생들이 뒤끓는다. 저놈들이 누구를 믿고 저렇게 놀고만 있을까? 아마 「희망의 성모」님을 믿고 저러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