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34) 베니 아베스 주변의 싸움 ②
발행일1962-05-27 [제328호, 4면]
『한 사람은 독일 출신으로 과거가 상당히 험한 사람이었는데 듀 보스트 박사에게 죽음의 선고를 받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신부를 대단히 싫어했으나 며칠 후에는 신부 없이는 견딜 수 없게 되었읍니다. 신부는 나에게 그 사람도 친구들과 같이 고해성사도 보고 영성체도 했다고 말했읍니다.
샤르르 수사는 이와같이 하여 「타키트」에서 3주일 동안을 지냈다.
이러한 소동은 알제리아를 대단히 동요시켰다. 총복두에서는 강력한 장군이 필요하다고 해서 찾아낸 것이 리오디이였다.
리오디이도 역시 후꼬오의 옛 친구였다. 그는 「세산느」에 있을 때 경기병이었으나 1880년에 아프리카의 엽기병이 되었고 알제리아에 2년간 주둔한 뒤에 가리에니 장군의 명령하에 인도지나와 마다가스칼에 원정했다. 그는 이미 두개의 논문을 써서 대단한 반영을 일으켰기 때문에 유명했다. 그것은 『사관의 사회적 역할』과 『군대의 식민지적 역할』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서 주장하는 것은 독립정신이였으며 그것은 반군국주의나 군인만능주의와는 인연이 먼 것이다. 그는 그가 제4경기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아랑송」으로부터 소환되어 「아인세프라」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10월 9일 도착한지 4일후 그는 알제리아 기병과 척후병 약간명을 대동하고 모록코 영토인 「휘기그」를 시찰하고 있었다. 그때 「휘기그」인들은 흰 테라스 위에서 놀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그후 며칠 후에 그는 샤르르 수사를 만났다. 이료디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03년이었다. 내가 마침 「아인세프라」에서 남오랑지방의 지휘를 담당하게 되었었다. 나는 20년전의 후꼬오를 알고 있었다. 그 당시 그는 콘스탄틴 지방에서 나는 알제리에서 각각 경기병 중위가 되어있었다. 그는 대단히 유쾌한 친구였다.』
『그후 나는 멀리 떨어진 극동 마다카스칼에서 그의 생활이 변했다는 소식을 막연한 소문에서 듣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왔을 때에는 그의 감탄할 만한 사업과 그의 서적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며 그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동안 한번도 만난 일이 없었다. 후꼬오 신부가 남부로부터 와서 그곳을 통과하고 있을 때 나는 사령관이 된지 수일밖에 안된 때였다. 그는 나의 손님으로 환대를 받고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아인세프라」에 3일간 체류했다. 여기서 회식한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즉 앙리 소령, 베비요 대위, 포와이미로 대위 등 모두가 원기 왕성한 친구들이었다. 우리들은 확실히 모록크와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의 혜택으로 심심치 않았다. 그러나 3일간 계속해서 농담없이 지낼 수 없었으며 식탁의 기분으로 때때로 우리는 후꼬오 신부가 이제는 드 후꼬오 중위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도 그것 때문에 기분을 상하는 일은 전연 없었다. 웃기도 하고 앞에 놓인 샴팽으로 입술을 추기기도 했다.
나는 그가 몇번이나 포와이미로에게 이런 저런 피아노곡을 처달라고 부탁한 것 까지도 보았다. 그리고 나는 혼자말로 「이는 물론 성인이다. 그러나 이 성인은 옛 친구들 사이에서 약간 실수를 해도 곤란할 것은 없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 그러했다. 그러나 그가 출발하게 되었을 때 알제에서 한시간 후에 여행자 일대가 온다는 전보를 나는 받았다. 그러므로 나느 ㄴ급히 드 후꼬오 신부의 방을 깨끗이 새로 정돈하라고 부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각하 아무것도 할 일은 없읍니다. 침대는 그대로 있읍니다. 사흘밤이나 외투를 입고 그대로 땅바닥에서 주무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기 우리들과 같이 식탁에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신중히 행동했으며 가지 생활의 규범에 대한 뜻하지 않는 순간적인 탈선을 얼마나 엄중하게 양심적으로 판단하고 있던가르 ㄹ이때 처음으로 이해했다.』
『수주일후 나는 베니 아베스에 도착했다. 이때는 위험한 시기였다. 우리는 「제벨 베샤르」산을 넘지 않고 있었다. 그 지방은 비적과즁크(날치기로 습격하는 무장한 소클럽)가 멋대로 횡행하며 「즈스파나」에로 통하는 길은 대단히 위험했다. 호위대를 데리고 포화속을 뚫고 겨우 그곳에 도착했다. 남부에서 와서 그 다음날 알제로 출발할 생각을 하고 있는 후꼬오 신부는 나와같은 때에 도착했다. 『신부님 나와 같이 북쪽으로 갈려면 5일간만 출발을 연기하셔야 합니다. 당신을 위해서 호위를 빌려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신부님은 대답하기를 누구와 만날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이튿날에는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때 그 숙영지의 사령관이 나서서 말했다. 『그러나 각하 당신은 아직도 드 후꼬오 신부께서는 결코 호위대 같은 것은 필요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시나요. 신부님께서는 말을 타고 단독으로 어떠한 비적 사이라도 습격당할 염려 없이 통과하십니다. 신부님을 만난 사람들은 땅바닥에 업드려서 바라카(축복)를 청하고 신부님의 외투자락에 키스를 할 것입니다. 떠나시게 두십시요』 이로서 나는 그가 회교도 들에게 참된 은둔자(마라부트)라는 인증을 받고 있어서 사하라의 회교도 전체에 대해서 얼마나 세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실히 알게되었다.』
북아프리카에 있어서의 리요디이의 파격적인 정치적 성공은 단지 그의 군인기질의 혜택뿐이 아니라 적어도 그의 인간적 가치의 결과인 것이다. 그것은 본국 정부의 관료와 군인의 군인만능주의에 대해서 정신적 독립과 획도에 대한 넓은 시야인 것이다.
그는 토민을 압학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 대한 인종적인 경멸을 입밖에 내기 보다는 그들의 문화의 자랑할 만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힘이나 능력보다 더욱 강안 이 명랑한 성실이 그 대상으로써 그에게 적의 존경과 공감을 얻게 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그에게 화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이 성의(誠意)였다. 그는 피정복자들을 존경하며 처리했다. 라페리느가 「호가아르」에 거둔 성공도 그 중요한 원인도 이것과 같은 것이었다. 리요디이는 정복하기는 하나 그 자신도 또한 정복 당하는 것이다.
오아시스를 시찰할 때는 그는 「풍 다 무송」 혹은 「샤토오드」에서 자기의 부대를 검열하는 장군이라기 보다는 수울탄과 더욱 흡사했다. 즉 별을 많이 단 검은 부르느(두건 달린 외투)를 입고 이국적인 화려찬란한 것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이것을 훌륭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제 일렬에는 9명의 사관이 늘어서서 나를 따라온다. 대단히 다채로운 군복을 입고 모든 사람이 머리에 흰 가이그(被衣)를 쓰고 있다. 대대기와 대장과 토민 관리의 행렬은 비로오드 비색(비色)의 면포와 비단과 황금의 신포니다. 그 다음에 프랑스군 알제리아 기병과 알제리아 척후기병 최후에 낙타병의 높은 대열이 따른다….
우리들이 도착한 것이다. 우리들 앞에는 사령관의 텐트가 있다. 이것을 토민관리들이 우리를 위해서 세운 것이며 형형색색이며 베란다와 같이 드높고 푹신푹신한 융단과 쿳숀이 있고 검은 타조의 날개를 단 커다란 깃발이 물결치고 있다. 연회 「디이파」를 준비하는 불이 이제막 떠오르는 달빛에 더욱 붉게 타오른다.』
리오디이와라 페리이느의 비결 그것은 그들이 적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경한 것이었다. 그들은 전쟁터의 기사도적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이것이 드 후꼬오 신부의 환경이다. 즉 노예제도, 비적, 전투, 관병식, 이스람교, 아프리카군, 사목의 유목민의 고귀한 생활 등 가장 좋은 것과 가장 악한 것이 혼합된 일대 경기장이다. 이러한 모든 동요한 가운데에 있어서도 신부는 물들지 않는 은수자의 혼을 지니고 있어 열렬한 혼의 소유자이며 종교의 수수께기 속에 고민하고 있던 리요디이는 유브랑 신부에 의해서는 회심하지 못했으나 깊은 노스탈지 없이는 회교도의 열성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통행인 모든 비참한 사람들의 은신처인 「베니 아베스」의 은둔소에 가만히 들어갔을 때 그는 모든 화려한 것을 초월한 청빈과 의식은 다를 것이 없었으나 브르조와 교회의 정오 미사때 보다는 다른 모습을 한 전례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