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春期(사춘기)]
가정 · 본당 · 학교에서 본 少女(소녀)들의 內面生活(내면생활)
그들은 무엇을 바라나?
발행일1962-05-27 [제328호, 4면]
자녀들의 행복한 장래를 생각하는 부모들의 마음은 다 같습니다. 어느 부모가 그것을 바라지 않겠읍니까? 그러나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이 어지러워가고 또한 만족할만한 교육의 힘을 보태주지 못하는데서 뜻하지 않은 무서운 결과를 비져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학생들의 사춘기의 시작이라 할까요 그 첫 머리를 살펴보고자 여학생들의 사춘기현상을 주제로 신상조 신부님과 장안나 여사와이 대답(對答)을 엮어보았읍니다. (文貴在 記者)
사춘기의 특징 (身體 · 精神의 成長)
申相祚 神父=여학생들의 사춘기는 대개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張安羅 女史=13세에서 16세까지의 여자중학생들을 다루고 있으면 그것이 13·4세쯤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申=이때에 어떤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지요.
張=누구나 자기의 성_을 생각해보면 어렴풋이나마 기억을 더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학생의 경우는 아주 감상적인 심정을 가지게 됩니다. 음성이 변하는 중학2년 때가 고비이지요. 제자만이 아니라 주위에 보는 것 마저 센티하게만 보여지고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육체의 성장보다 오히려 정신의 발달이 앞서는 같기도 합니다. 거기 「안바란스」와 갈등이 있는 것 같아요.
申=아직 틴 에이져까지는 이른데 억제할 수 없을만한 감정을 가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張=틴 에이져 같은 노골적인 표현은 없지요만 자신을 「콘트롤」하지 못하고 있음이 역연합니다. 가끔 감상에 잠기고 하는 사실을 무시못합니다. 자신들도 느낄만큼 조숙(早熟)해지는 수도 있고 감수성이 예민해져서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 합니다. 이것은 필경 위험한 모방심리를 작용하게 해준다고 봅니다.
感傷에 잠기고 할때 점잖은 대접을
申=그런 특색을 선용(善用)하는 길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감상은 심미(審美)에로 순화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張=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와 교사들의 섬세한 관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와 교사들은 아이들의 세계를 참으로 바르게 이해해줘야 합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들은 좀 더 어른답게 대우해 주기를 바라고 있읍니다. 어른들은 자칫하면 지나치게 어리게 대접하기가 쉽습니다. 육체의 성장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춘기의 감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겠읍니다.
申=반항심을 크게 표현하는 일은 없읍니까?
張=사춘기의 반항은 남학생들이나 틴 에이져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두가지 형의 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읍니다. 감상이 풍부한 탓인지 부모나 교사 앞에 거짓말을 꾸미는 아이와 즉각 반대의 사를 거칠게 표시하는 아이가 있읍니다. 반대의사를 즉각 표시하는 편이 명랑해질 수 있고 다루기도 좋은 줄 압니다.
申=제 생각을 즉시 표시할 수 있는 편이 좋을 겁니다.
張=그런 아이들은 솔직하고 감추는데가 없는 듯 해요.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믿을 수가 없고 결국 문제아가 되는 수가 많은 것 같읍니다.
申=교사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지요.
張=맹목적인 관심이라 할까요 특히 사생활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申=남자선생과 여자선생의 어느쪽에 더 큰 관심을 보내고 있을까요?
張=여학생들이니까 드렇겠죠만 여선생님의 입성 몸차림에 이르기까지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학교의 남자선생님은 항상 주시의 대상이 되고 있지요
申=교사에 대한 존경은?
張=이것 역시 맹목적 존경을 보내는 수도 있고 대체로는 교사를 존경치 않는데 큰 탈이 있지 않을가요. 집안에서부터 학교선생을 대수롭지 않게 함부로 말하고 하기 때문에 존경에 금가는 일이 많은 줄 압니다. 학부형들이 교사를 잘못 대할 때 학생들이 스승으로 여길리가 없지 않겠어요.
道義敎育과 靈性指導
申=존경은 교육활동의 중요한 요소이겠읍니다. 그런데 가톨릭학교에서 도의교육과 여성지도는 업적한 의미에 있어서는 구분될 수 없겠읍니다만 형식적으로는 역시 한계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성에만 치중해도 일반 사회도덕을 충분히 해득못한다던가, 혹은 학과로서의 도덕과를 소홀히 할 수 없지요. 이 점은 어떻게 중간을 취하고 있읍니까?
張=저이들 학교서 이것을 문제삼은 일이 있읍니다. 교장선생님이 어느 강습회에서 듣고 오신 것을 이렇게 말씀해주셨읍니다. 어느 교사가 국정도덕 교과서의 분량이 많으니 정한시간에 다 해낼 수가 없다고 말하니까 교과서는 어디까지나 재료로 쓸 것이고 그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국정 교과서를 이용해서 거기 불충분한 곳을 보충해주고 가령 어느 도덕조목의 근본을 가톨릭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줄 생각됩니다.
교과서에는 전혀 근본을 들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申=그러자면 교사가 아주 수고가 되겠읍니다.
사춘기 문제로 되돌아 가서 요즘 실행되고 있는 카운셀러제도는 어떻습니까. 실지로 효과를 바랄 수 있는지요.
張=그렇겠읍니다.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지도할 수 있겠읍니까. 외국의 가톨릭 영영학교는 참으로 실질적인 교육을 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개인지도를 할 수 있는데서 얻은 성과이겠지요. 서울에 있는 성심회 경영 학교서는 여학생들의 걸음거리까지 지도한다는 말을 듣고 부럽게 생각했읍니다. 우리 실정과는 거리가 먼 얘기 같습니다만 정서교육은 사춘기의 촉발하는 감정을 순화시켜 주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음악교육 같은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노래가 그치지 않는 가정을
張=음악은 최선의 방도이겠지요. 이때의 아이들은 음악을 아주 좋아합니다. 음성의 변화도 있고 해서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하지요. 그러나 음악을 좋아하고 감강하려고 합니다. 음악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여우들의 「프로마이트」를 모으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미(美)의 동경에서 온 것이 아니겠어요.
申=아이들이 흥겨울 만한 많은 노래가 없는 것 같습니다.
張=그것이 문제입니다.
申=가정에서도 더 많은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겠읍니다. 음악의 생활화(生活化)는 그대로 정서교육이 되는 줄 믿고있읍니다. 노래로 기도를 드릴 수도 있읍니다. 성가는 성당에서만 부를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함께 부를 수 있어야지요.
성가의 생활과는 교우 가정에서 꼭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張=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가정의 결함입니다. 아이들이 「노란샤쯔」를 부르는 것을 들을 때 안타깝기만 했읍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집안이 되기까지만 해도 우리네 일반형편은 요원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것은 학교보다 가정에서 참으로 자녀들의 행복을 생각해서 즐거운 노래가 흐르는 집안을 만들어야 겠읍니다.
소녀들의 본당생활
申=주일날 학생지도 역시 상당한 계획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張=주일은 가족과 즐기는 원칙이 서야지요.
申=동감입니다.
張=본당생활도 아이들에게는 좀 더 자유스럽고 즐거웠으면 합니다. 즐겁게 나갈 수 있는 본당이 되기를 아이들은 바라고 있지 않을가요. 즐겁게 배울 수 있는 시간을 좀더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이들이 가족을 떠나거나 본당을 떠나서 주일을 자유로 지낼 때 방종할 위험이 있는 수가 많았읍니다. 가정과 본당이 너무 엄격할 때 특별히 사춘기에 드어간 아이들이 저도 모르게 방종하게 되는 수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을 예방해주고 보충해 줄 장소는 가정과 본당밖에 없읍니다.
성당 안서 가족끼리 한자리에
申=가족 동반을 장려하기 위해서 성당 안에서도 한가족은 모여앉았으면 좋겠읍니다. 성당 안에서 한가족도 남녀를 구별해서 따로 앉는 것은 큰 뜻이 없지 않을가 생각됩니다. 한가족은 역시 한자리에 모여 앉고자 하지 않겠읍니가?
張=성당 안에서 가족끼리는 모여 앉도록 장려되었으면 합니다. 보기에도 얼마나 따스하게 여겨지겠읍니까?
이것은 모두들 원하고 있는 줄 듣고 있읍니다. 아이들에 대한 가저으이 간섭이 지나치거나 엄격만 한 것도 좋지 않았읍니다.
申=그렇지요 감시만 풀리면 더 잘 못할 수 있지요.
張=고해성사, 신공 등을 지나치게 강박하는 것은 좋지 않을 듯 합니다.
申=프랑스에서 학생미사때 성당 문전에서 자기가 영할 면병을 각자의 손으로 담는데 스스로 한식탁에 모인 형제인 것을 더 잘 의식케 해 주는 줄 여겼읍니다. 신심생활의 지나친 간섭은 해롭습니다.
申=가정 · 본당 · 학교간에서 자라나고 있는 우리의 아기들 특히 그들의 사춘기의 특징을 그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가지신 장선생님과 함께 관찰해왔읍니다. 무슨 이론보다 그들이 사춘기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만 둔다면 모든 예방적인 손을 쓸 수 있겠고 그만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