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방에 만뢰(萬雷)가 한 메아리 되어 구세주 그리스도의 강탄(降誕)을 경축한다. 역사는 돌고 또 전진하면서 그리스도로서 회복한 전인류의 평화를 오직 지극(至極)한 겸비(謙卑)로서 만상(萬上)에 받들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평화! 그것은 또한 오직 완전한 논리(論理)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 완전한 평화의 논리(論理)를 희구하게된 것이다. 인류의 소망(所望)과 인간의 갈망하는 그것은 필경 동일한 것이겠다. 인류의 소망이 평화에 있다면 인간의 그것도 당연히 거기 달려 있을 것이다. 그 최종결론은 오뇌와 비원(悲願)을 해탈(解脫)할 수 있는 인간고(人間苦)의 극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쟁취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때문에 제 영혼을 구하지 못하고서는 아무 것도 구해낼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의 평화 없이 세상의 평화는 보장될 수 없다. 이같이 단순한 평화의 논리는 너무나 멸시당하고 있다. 현대인이란 그 이름때문에 자기파탄(破綻)의 함정에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현대인의 모습을 묘파(描破)하건데 그는 자연의 미(美), 그 질서(秩序) 또 모든 지혜를 찾아보지 못하고 미 보다는 추(醜)를 질서보다는 무질서를, 지혜보다는 허무(虛無)와 불가지(不可知)를, 그리고 자살과 핵무기에 의한 파멸을 자초하거나 거기 무용한 집념을 박차버리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은 이같이 스스로 파탄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저 성당 종탑에 나붙은 성탄 「데코레숀」 별! 누구나 쳐다볼 수 있는 거기서 우리는 지극히 소박하면서 그러나 완전한 평화의 논리 및 그 오묘한 이치를 얻을 수(受諾)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거듭 말하거니와 자기를 구하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제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현대인의 착각(錯覺)을 외길로 단죄(斷罪)하기에 앞서 우리는 또한 깊고 넓은 이해(理解)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인의 특징은 자기분열(自己分裂)에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어느 정신병든 청년을 본 그리스도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이름이 군대오니 대저 우리 수가 많음이니이다』(말구 5장9절) 이 정신병자는 「나」라고 하지 않고 자기를 수많은 복수(複數)인 것을 밝혔다. 이는 분명히 수만으로 얽히고 얽혀진 자기 혼란과 거기 따르는 끝없는 불안(不安)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자기분렬을 이같이 표현한 __로 볼 수 있다. 복음성서는 이 젊은이의 불행을 다음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는 무덤에 거쳐하는 자다. 아무도 능히 사슬로 저를 결박치 못하니 대저 가끔 착고와 사슬로 결박하여도 사슬을 끊고 착고를 부스러뜨려 아무도 능히 저를 억제치 못함이러라. 주야로 항상 무덤과 산에 있어 소리지르며 제 몸을 돌로 부수』고 있었다. 이런 자기 모습을 현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캄푸라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대인은 스스로 장만한 감옥에 갇혀 제 손으로 잠을쇠를 놓고있는 것이 아닐까. 그 해결을 「후로이드」에서 구한다고 한다. 그로 말미암아 자아(自我)의 아성(牙城)은 더욱 굳어지고 드디어 자기를 상실하기 전에 아무런 해결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까뮈>는 건전(健全)한 사람이면 다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실정에 있는 현대인 및 그 환경을 중시(重視)하고 있다. 그들로 인하여 날로 현대화(俗化)되어 가는 모든 문화환경을 주목하고 있다. 그들의 영향력, 그리고 그 암시(暗示)하는 바는 참으로 지대(至大)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라디오, 신문, 영화 등은 거의 이땅의 사고(思考)를 좌우하고 있다. 10년, 20년을 두고 닦아온 신자생활을 그들의 전위적(前衛的)인 선전에 여지없이 굴복당하는 일은 없는가. 얼마전 광주교구장 <하롤드.헨리> 주교님은 관하 본당 신부들에게 권하여 『우리 교우들은 대부분이 새로 입교하였으므로 그들의 신앙이 견고하게 되어야 한다. 그들이 교리만 배울 것이 아니라 가톨릭 「뉴우스」를 들어야 한다. 이는 교회에 대한 그들의 견식을 넓힐 것이며 그들의 생활을 가톨릭적 견해에서 영위해 가게 할 것이다』고 하면서 본당 신부들이 가톨릭 출판물 특히 가톨릭신문을 읽도록 교도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신자생활이 문화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상 두 가지 상충(相衝)되는 말을 강조한 셈이다. 즉 그리스도적 평화는 지극히 평범한데 있다고 하고 그러나 그것은 더욱 의욕적(意慾的)인 쟁취(爭取)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한말로 돌진(突進)과 반돌진(反突進)을 조화시키는 의식적인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하겠음을 강조하였다. 되뇌이거니와 우리는 단석탑(單石塔)적인 완성을 서둘으지 말아야 한다.
오늘 성탄호를 내면서 또한 해를 마감하는 우리의 가슴은 무겁고도 벅찬 것이 있다.
또한 두렵고 송구스런 일이 모두인 것을 실토하는 바이다. 첫째 「뉴우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번도 가다듬고 반듯한 지면을 내놓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문화의 「후론트」에 설만한 참으로 아무런 마련도 갖추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강호독자 제언의 관용과 새해에는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지도편달에 기대하는 바이다. 성탄의 축복이 먼저 귀가정에 나려지고 마침내 온누리를 채우기를 빌면서 성탄사에 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