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敎區(대구교구) 50週年(주년) 紀念特輯(기념특집) 記念辭(기념사)
새로운 前進의 基点되도록
건설 위한 희생과 노력
自覺과 協力 一致의 정신으로
발행일1961-12-25 [제308호, 4면]
한국 가톨릭교회는 1784년부터 1831년 「로오마」 성좌(聖座)에서 『한국교구』를 설정할 때까지 4십5년간 중국 북경(北京)교구에 소속되어 있어 그동안 신부 한 분이 6년간 주재했을 뿐 나니지 약 40년(한국교구 설정 후에도 5년간은 신부 없었음)은 평신자들만이 박해 가운데서 독자적인 전교활동을 해왔으며 한국교구가 독립된 이래 80년간 단일(單一)교구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피와 땀과 희생으로 1911년에는 신자수 7만3천5백여 명이라는 수확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넓고 큰 포교의 터전을 한 교구로서 개척하기는 너무 벅찬 일이었으므로 성좌(聖座)에서는 한국에 교구 하나를 더 증실할 것을 결정하고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병립(倂立)시켜 충청도 이북(以北) 지역을 서울교구가 관리토록 하고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를 남방(南方)교구인 대구교구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는 한편 대구교구의 첫 감목으로 <풀로리안.더망즈>(安世華) 신부를 『아드라센시스 주교』의 명의(名儀)로 주교품위에 서임한다고 1911년 5월3일에 발표했던 것으로서 금년은 그 50주년이 되는 것이다.
금년은 우리 대구교구가 창설된 지 50주년에 해당하는 뜻깊은 해입니다.
거금 50년 전인 1911년 교황 성 <비오> 10세 성하에 의하여 대구교구가 설정된 것은 1831년 한국 성교회가 중국의 북경(北京)교구의 관하에서 독립되어 한국교구가 설정된 이후 80주년만에 처음된 큰 경사였고, 한국교회사(敎會史)에 획기적인 새시대(新時代)가 시작이였을 뿐 아니라 이는 또한 이 땅에 있어서 가톨릭 포교(布敎)가 모진 박해 가운데 1백20여 년이란 긴 세월동안 영웅적(英雄的) 노력의 아름다운 보수(報酬)였던 것입니다.
회고하면 오랜 세월 동안 인내와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포교의 개척자(開拓者)들과 그들을 또한 희생과 기구로써 협조한 존경하올 선열(先烈)들은 오늘날 그들이 뿌린 복음의 씨와 가꾼 신앙의 열매를 결실(結實)을 보지 못하고 천국으로 가시었지만 그들이 품었던 이상(理想)과 포부와 그 정신적 후계자(後繼者)인 현재의 여러 전교신부들과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모든 은인들은 모두가 그들이 참으로 천주의 영광과 인류의 구령을 위하여 충심으로 즐겁게 헌신적으로 봉사했다는 사실의 증거자들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과 함께 우리 가톨릭교회 전체가 복음의 전진(前進)을 바라보며 천주께 겸손된 감사의 기구를 올리는 이 마당에 특히 대구교구에 소속된 모든 성직자나 수도자나 신자들은 깊은 자각(自覺) 아래서 먼저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反省)해봐야 하겠읍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들의 큰 노력 없이 이 위대한 유산(遺産)들을 물려받았읍니다. 우리는 과거의 선열(先烈)들의 남기신 업적과 유산이 훌륭하면 훌륭한 그만큼 우리에게 부과된 사명과 책임은 더 크고 무거운 것입니다.
이 50주년의 기념이 앞으로 새로운 발전과 전진(前進)의 한 기점(基点)이 되어야 할 것이며 교회 역사의 새 페이지를 구밀 약진의 새 시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유구한 2천년의 교회사에 비겨볼 때 50년의 세월이란 짤막한 하나의 순간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세기(半世紀) 동안에도 세상은 여러 모양으로 변해왔읍니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이 시대는 50년 전의 그때와는 여러 가지 면에있어 많이 달라졌읍니다. 변천이 많은 세태(世態)와 급진적으로 달리는 시대조류(時代潮流)는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전교방법에도 많은 변화와 개량(改良)이 가해저야 한다는 것은 여러 말할 필요가 없읍니다. 근대적인 기술에 의해서 우리에게 부여된 포교방법은 다종다양(多種多樣)한 것이며 교육과 자선사업과 문화분야에 있어 우리의 활동은 우리 나라의 실정을 잘 통찰하고 날로 진보하는 과학 발전에 보소를 같이하여 적절한 개선(改善)을 가해서 그 효과를 풍성케 하도록 함과 동시에 가톨릭 사업의 권위를 확보하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물려받은 사업들을 유지함에 있어서도 많은 개선이 필요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실정에 부합한 새로운 사업들을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일치협력(一致協力)의 정신을 진작(振作)시키고 새로운 건설을 위한 희생과 노력이 요청된다는 것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대구교구 50년 역사 중 30여 년의 역사는 한국교회의 양육자(養育者)였던 「빠리」외방전교회의 은덕으로 자라온 역사로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교구를 유지한 역사는 짧은 것입니다.
이제 50주년의 기념해를 당하여 우리들이 자각(自覺)할 것은 완전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교회 사명을 완수하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선열들을 조상으로 뫼셨으며 그들의 참된 후손임을 떳떳이 자랑할 수 있겠금 『천주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이 기회에 새로운 발분을 하여 봅시다.
■ 싱싱하고 무성한 굵은 가지 많은 새 가지와 좋은 열매 거두기를 -전주교구감목 韓 베드루 主敎
지난 10월29일 그리스도왕 첨례를 택하여 대구교구에서 교구 설정 금경축을 성대하게 축하하는 기회에 그리스도 왕국의 학대와 천주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동포들에게 전하는데 교구적으로 노력하며 충성을 다할 것을 대외적으로 선양하는 뜻에서 연합성체거동식을 개최한 것은, 대구교구의 경사뿐 아니라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1749년에 그 씨가 우리 강토에 뿌려진 후 자라난 한국성교회라는 신비로운 나무는 1801년, 1839년, 1846년, 1866년, 도합 네 차례나 혹독한 박해의 도끼에 썩히었어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치명자들의 선혈을 거름삼아 자라고 자라, 이 신비로운 나무는 마지막 박해를 치룬 후 45년만에 싱싱한 새 가지를 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1911년 5월3일에 교종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설정된 대구교구의 탄생이었읍니다.
1910년 이래 36년간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또 해방 후 15년간 사회적 혼돈도 무릅쓰고 대구교구는 그 초대교구장이신 안주교님의 『신뢰하고 일하자』는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장족의 발전을 하여왔으니, 1931년에 전라도를 방인(邦人) 자치교구로 만들 준비로 <스데파노> 김(金洋洪) 신부님이 전라남북도의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되여 전주에 주재케 되였고 1937년에 전주교구와 광주교구가 설정되었고 1957년에는 부산교구가 설정되어 대구교구라는 싱싱한 가지에서 세 교구가 설정되도록 하게 한 그 공훈을 우리가 찬양하여 마지 않습니다.
또 현재 교구장이신 서주교님 산하에 신부 85명, 신학생 95명 수사 74명 수녀 561명, 본당 40, 수도원 4, 각급학교 11, 유치원 13, 주일학교 81, 보육원 2, 병원 1, 양로원 2, 신문사 2라는 교구활동을 개관할 때 대구교구는 어느모로 보든지 교구다운 면목을 갖출뿐 아니라 그 내용이 충실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대구교구의 성직자 수도자 신도들이 그 오랜 전통을 지키며, 새로운 구상 아래 일치단결하여 교구발전에 이바지한 결과라고 믿지 않을 수 없읍니다.
대구교구의 은혜를 어느 교구보다도 많이 받은 전주교구의 책임자로서 나는 대구교구라는 굵은 가지가 이왕에 첫던 바와같이 모든 면에 있어서 그 은혜로운 많은 가지를 더욱 많이 퍼지게 하여 아직도 우리 사회에 있어 영육간의 많은 불행한 사람들이 이 가지들 위에 깃들여 구원과 휴식을 얻게하여 주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 대구교구와 나 -부산교구장 서리 張 요셉 神父
금년은 대구교구가 설정된지 50주년에 해당하는 해이고 대구교구는 교구 설정 금경축을 맞이하였다. 본인은 대구 태생으로서 나이가 만 49세이므로 대구교구가 탄생한 이듬해 나서 같이 자라난 셈이요 또 대구 성 「유스띠노」 신학교를 졸업하여 신부가 되었으며 신부가 된 후에도 10여 년간 대구에서 근무하였고 부모형제 친구들이 대구에 계시므로 대구와는 끊을라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서 대구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여 말 그대로 감계무량하다. 너무 어려서 설정 당시의 내력은 잘 모르지만 나의 소년 시절의 기억으로는 성당은 계산동 성당 하나밖에 없었고 현재의 주교관과 「마사비엘」과 『성-유스띠노 신학교』 교사가 건립되여 대구에서는 가장 큰 건물로서 누구나 다 우러러 보았으며 지금 그 자리를 꽃을 많이 재배하였던 관계인지 화원이라 불렀다. 신학교에 있을 때에 매주 토요일 저녁에 성모당에 가서 노래와 기도로서 「오라또리움」을 하던 일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지며 속세에 젖은 이 몸이지만 다시 한 번 그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의욕이 복바친다.
20여년 후 안주교님의 영단으로 전라북도에 방인교구가 설정된 것이 장차 한국에 모든 교구가 한국 신부 수만 어느 정도 확보되면 방인교구로 독립할 수 있다는 고무적 처사이기도 하였다. 그 후 전라남도를 애란 「성 골롬바노」회에 일임하여 새 교구가 설정되였고 5년 전에는 경상남도 부산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대구교구는 전주, 광주, 부산 세 교구를 분가시켜 자주 독립케 하였으며 오늘날 다른 교구에 비겨 손색이 없을만한 교구로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모두 종가집의 덕택이 아니고 무엇이랴. 더구나 부산교구는 최근에 분리되여 나왔으며 현재 교구 소속 신부네들이 경북 경남에서 혼성이 되여있기 때문에 더욱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터이며대구교구가 다른 교구이다는 생각이 없다. 오늘에 있어서 기분이 나쁜 일은 파리외방 전교회가 대구교구에서 손뗄 때 한국인 신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하야사까> 주교님께 교구를 맡겼을 때였는데 민족적 감정이 마음으로부터 그를 환영하기가 대단히 어려웠고 또 교구사업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요 장래 교회의 일꾼을 양성하는 기관인 신학교를 일본 군대가 강점하여 신학교에서 교구 신부 신학생들이 축출을 당할 때였다. 너무나 억울하여 손에 손을 잡고 대성통곡하던 일이 새삼스럽다. 기억을 더듬어 실마리가 걸리는대로 일일이 다 적어보려니 지면이 허락지 않는다. 바라옵건데 우리의 큰 집인 대구교구가 남긴 업적이 너무나 크기에 거기에 해당하는 천주의 은총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큰 발전을 이룩하여 그리스도 왕국 확장의 선봉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우리 적은 집들은 그 은공을 언제나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선물로 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