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5월3일 교황 성 <비오> 10세의 대구교구 설정반포에 의하여 당시 『경향신문』 사장 <풀로리안.더망즈>(安世華) 신부는 6월11일 <아오스딩.뮤텔>(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서울에서 주교위에 성성되고 그 달 26일 임지인 대구(大邱)로 부임함으로써 새 교구 창건(創建)의 역사가 시작.
▲『신뢰하고 일하자』를 못토로 삼은 <더망즈>(安) 주교는 1913년에 주교관 건물을 이룩하고 1914년에는 『성 유스디노 신학교』를 설립했으며 1915년에는 『성 바오로 수녀원』을 설립했고 1918년에는 주교좌 대성당의 증축(增築)이 되었으며 한편 신자들의 집회소(集會所)인 『명도회관』(明道會館)을 신축.
▲주교관과 신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넓은 기지는 <아오스딩> 서(徐相돈)씨가 그의 소우 1만여 평 땅을 바친 것이며 주교좌 대성당의 증축비는 <야고버>(__和)씨와 <김종학>(金鍾學)씨 등이 거액의 비용을 자진분담한 것이다. 10년을 예상한 교구 중요시설이 7년만에 이룩된 감사로 「루르드」의 「마사비엘」 동굴을 그대로 본떠 건립한 성모당을 구원(久遠)의 기념으로 봉헌.
▲장차 본방인에게 교구를 맡기기 위한 준비로 방인성직자 양성에 주력하여 신학교를 확장하는 한편 <스데파노.샬즈버프>(宋德望) 신부를 교장으로 임명, 교육 과정과 제도(制度)에도 많은 개선(改善)을 하여 당시 『성 유스디노 신학교』는 동양 여러나라 신학교들의 모범이 되었고 <더망즈>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이만 4십4명인 바 그 중 2명은 후에 주교로 성성되었다.
▲1931년 5월9일 방인자치(邦人自治) 교구의 준비로 전라도 지구를 감목대리구로 설정 1934년 4월10일 전라도 감목대리구에서 전남(全南)지구를 분리하여 애란 「성 골롬반회」 신부들의 전교구역으로 위촉하여 전남감목대리구를 증설
▲1937년 4월15일 교구 설정을 준비중이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에 대한 교황청의 교구 실정 발표가 있어 전주(全北)교구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방인자치교구로 출발하게 되어 첫 교구장에 <스데파노> (金洋洪) 신부가 임명되고 광주(全南) 교구장에는 <오웬.막폴린>(林) 신부가 임명
▲1938년 2월9일 <더망즈> (安) 주교 「간경변증」으로 별세
▲1938년 12월13일, 「로오마」 성좌에서 제2대 감목으로 <제르만.뭇세> (文濟萬) 신부를 임명하고 『이레노뿔리따누스주교』의 명의를 부여한다는 발표로 <뭇세> 신부는 1939년 5월7일 <샴뽕> 대주교의 주례로 대구주교좌성당에서 주교품위에 성성
▲1941년 12월에 일어난 태평양전쟁으로 일제(日帝)는 종교활동에 대해서도 국가통제(統制)를 실시하게 됨으로 <뭇세> 주교는 사임하고 1942년 8월30일 그 후임으로 일본인 <이레네오.하야사까>(早坂久兵術) 신부가 『수페따누스 주교』의 명의로 교구장에 임명되어 10월8일 대구로 부임하고 12월25일에 <뭇세< 주교의 주례로 주교위에 성성. 자치교구(自治敎區)의 첫 교구장이라는 명분(名分)으로 시련기(試鍊期)에 처해있던 한국교회의 권익을 수호할 사명을 지니고 부임한 <하야사까> 주교는 1945년 초부터 「척추가리에스」로 병상의 몸이 되어 1946년 1월6일 세상을 떠났다.
▲1946년 1월16일 「로오마」 성청에서는 전주교구장 <바오로> (朱在明) 몬시뇰을 대구교구의 임시관리자로 전임(轉任)케 한다고 발표하여 주 <바오로> 교구장은 2월27일 착좌식을 거행코 취임 <주.바오로> 교구장은 교육사업을 통한 전교에 힘쓰고자처하여 폐교된 『성 유스디노 신학교』의 건물을 이용한 『대건(大建)중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는 대구교구로 전임된 이래 3년 4개월을 봉사하고 1948년 5월21일 사임
▲1948년 6월1일 교황청에서는 서울교구 감목 <바오로> (盧基南) 주교를 대구교구의 임시관리자로서 겸임(兼任)토록 하였으므로 노주교는 약 8개월간 서울과 대구에 번갈아 주재하면서 후임주교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1948년 12월9일 「로오마」 성좌에서는 대구교구 감목으로 <요안> (崔德弘) 신부를 『안테도넨시스주교』의 명의를 부여하고 주교위에 서임한다고 발표하여 <요안> 최교구장은 1949년 1월30일 <바오로> 노(盧)주교의 주례로 주교위에 성성 『사랑은 모든것』이라는 못토로 교구창설자 <더망즈> (安) 주교의 업적과 열심한 사목을 본받으려한 최주교는 가톨릭 인재(人材) 양성과 교구 내에서 일할 전교단체와 수도회의 초빙 및 새로운 교구사업의 시작 등 여러 방면으로 교세 확장에 노력했다.
▲1948년 9월에 조직된 『대구교구 가톨릭 청년회 연합회』는 그 전 『남방천주공교 청년회』가 발간하던 『천주교회보』의 발행을 결정 1949년 4월1일자로 중간(重刊) 제1호를 냈으며 <요안> 최주교는 1951년 5월 『천주교회보』의 간행을 교구에서 인수하였는데 『회보』는 1953년 5월 이후 『가톨릭시보』로 개제(改題)했다.
▲1950년 6·25 전란으로 교구내 31개 본당 중 공산군이 침입했던 곳이 21개처며 교전(交戰)으로 피해를 입은 성당이 12개처였다.
▲1950년 12월1일 대구에서 발간되는 3대 일간(日刊) 신문의 하나인 대구 『매일신문』의 경영을 교구에서 인수하였다.
▲1952년 3월12일부터 3일간 전란후 처음이며 8·15 후 두 번째인 교구장 회의가 대구주교관ㅇ네서 개최되었다.
▲1952년 4월2일 『효성여자대학』의 인가를 얻어 앞서 설립된 효성중·고등학교와 국민학교 및 유치원을 망라한 『효성학원』(學園)이 이룩.
▲덕원(德源)에 있던 『성분도수도원』이 피난와서 교구내 왜관(倭館)에서 수도원을 재건하게 되고 <디모테오.빗델리> (李) 몬시뇰이 수도원장겸 덕원 함흥 연길교구장직을 겸하게 되는 동시 대구교구의 한 감목대리구와 같은 성격으로서 칠곡, 성주, 선산, 김천, 상주, 문경 등 6개 군의 전교담당.
한편 원산(元山)에 있던 「성분도수녀원」은 대구에서 자리를 잡게 됐으며 연길(延吉)에 있던 「성분도·오리베다·수녀원」은 부산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54년 6월18일 경남(慶南) 지방을 교구로 발족시킬 준비로 경남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를 설정하고 감목대리에 <요안> (徐正吉) 신부를 임명
▲1954년 12월14일 <요안> (崔德弘) 주교는 「담도암」으로 별세
▲최주교의 별세 후 8개월간 교구장직은 <벨라도> (徐廷道) 부교구장이 서리(署理)하였다.
▲1955년 7월13일 <비오> 12세 교황 성하께서는 <요안> (徐正吉) 경남감목대리를 대구교구 감목에 임명하고 『초마띠따누스주교』의 명의를 부여한다고 발표. 9월15일에 <뭇세> (文)주교의 주례로 <요안> 서주교의 성성식이 거행.
서주교는 『네 나라이 임하시며……』를 시정(施政)의 못토로 선택하고 9월24일 제2대 경남감목대리로 <요셉> (鄭在右) 신부를 임명
▲1956년 1월3일 이태리 「제노아」에 관구를 둔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경남에 진출
▲1917년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이 대구로 진출했으며 『전교협조회』(S·A·M) 신부가 대구교구에 부임
▲1957년 3월7일 부산(慶南)교구가 설정되고 첫 감목에 <요왕> (崔在善) 신부 임명 5월30일 <요왕> 최주교의 성성식이 거행되고 대구교구의 경남지방을 새교구에 이관(移管)
▲6월8일 제2대 감목 <뭇세> (文) 주교 별세
▲1958년 6월2일 안동(安東) 감목대리구를 설정 감목대리에 「빠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프랑소와.할레르> (河) 신부 임명.
▲1959년 7월1일 『성 프란치스꼬·꼼벤뚜알 수도회』 대구 진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