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輯(특집)] 교구 설정 以前(이전)의 史話(사화)
80年 前부터 시작된 準備
鮮血로 가꾼 沃土
발행일1961-12-25 [제308호, 5면]
『너희는 가서 만민(萬民)에게 복음(福音)을 전하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성실하게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로 조직된 『예수회』는 1540년 「로오마」 교황(敎皇)으로부터 동양포교(東洋布敎)의 명을 받고 1549년 <프란치스꼬.사베리오>성인에 의하여 이웃나라 일본(日本)은 이미 3천여 명의 가톨릭신자를 갖게되었으며, 중국(中國)에는 1581년 <마테오.릿치>(利瑪空買) 신부에 의하여 전교(傳敎)가 시작되었다.
■ 福音을 기다린 오랜 歲月
◇<프란치스꼬.사베리오>의 뒤를 이어 일본에서 전교하던 <가스팔.비레타> 신부는 1567년경부터 우리나라에도 진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 당시 엄격한 쇄국주의(鎖國主義) 정책으로 말미암아 「예수회」 신부들의 우리나라 입국(入國)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청(淸)나라에 인질(人質)로 연행되어간 <소현세자>(昭顯世子) 북경(北京)에서 사괴게된 <아담.샬>(湯若望) 신부를 통하여 천주교회를 알게되어 1645년 세자가 귀국할 때는 가톨릭신자 내시(內侍) 일_ 및 많은 교회서적과 성물(聖物)을 가지고 오게되었으므로 우리나라는 궁중(宮中)으로부터 시작하여 가톨릭으로 개종(改宗)할 것 같이 뵈이기도 했지만 불행이도 이 일의 추진자 되는 왕세자(王世子)가 환국한지 70일만에 급서(急逝)하게 됨으로써 모든 계획은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한국 교회사는 1784년 즉 <베드루> 이승훈(李承薰)의 영세입교로서 시초(始初)를 삼고있는 것이다.
정하상은 유진길(劉進吉)같은 동지를 얻게되어, 이여진(李如眞) 등과 활발히 노력한 결과, 1825년에 중국인 신부(深神父) 한 분이 한국으로 입국하려다가 중로에서 병사하였으며 「로오마」 교황께서는 외롭고 어린 한국교회의 애끓는 호소를 받으시고 눈물을 지우셨다 한다.
◇1827년에 또다시 지방박해가 일어, 전라도 일대에서 2백4십여 명의 신도가 전주감영에 수감되고, 경상도와 충청지대에도 그 여파로 많은 신자들이 잡혀, 처음은 상주(尙州) 옥에 수감되었다가 유명한 신자 45명이 대구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다.
이 박해 때에 전주에서 순교한 <베드루> 신대보(申大補)는 신유박해 후에, 교회 재건운동의 제1인자로서 활약하였으므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체포될 위험을 느끼고, 경상도 성주(星州) 「잘골」에 은거하였던 것이다.
■ 慶尙道의 첫 殉敎者들
◇성주에는 이미 많은 신도가 피난와서 살면서, 전교를 했던 고로 여러 교촌(敎村)이 생겨났었고 신 <베드루>는 그들을 권면하여 열심봉공하다가 마침내 1827년에 전주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호송되었는데 그의 심문기(審問記)는 너무나 유명하다.
◇신 <베드루>와 함께 전주에서 순교한 <바오로> 이(李宗會)의 순교록(殉敎錄)도 순교사기(史記)에서 저명하니 그는 신유년교난에 전주에서 순교한 동정부부(童貞夫婦) <이.루갈다>의 아우며 서울에서 순교한 <가롤로>(李慶道)의 아우로서, 문서전도(文書傳道)로 일생동안 활약하다가, 그가 그린 성화와 쓴 책으로 인연하여, 전주포교에게 잡혔던 것이다.
◇성주(星州)에서 신 <베드루>가 체포된 것을 동기로, 성주관원도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되어, 56처의 신자부락이 포졸들에게 포위되었다.
성주의 순교자 중 박견화(朴堅和)는 성주 양반으로서, 1792년 그가 33세 때 예비신자가 되었다가, 3년 후에 입국한 주(周文謨) 신부께 <바오로>의 본명으로 경상도의 최초 신자다.
그는 1827년 박해 때 성주 「명의목」(洞名)에로 옮겨, 그해 예수승천축일에 전가족과 인근 교우들을 모와 첨례를 보던 중, 포교에게 체포된 것이다.
함께 잡힌 그의 아들 박 <안드레아>(思心)와 성주 「앵무당」(洞名)에서 잡힌 김 <안드레아>(金士今)과 <리샬>(安君心)도 유명하였다.
◇김 <안드레아>와 안 <리샬>은 본시 충청도 태생으로 성주에 피난하여 살았고, 그들이 잡힌지 얼마 후에 잡힌 이 <안드레아>(李宗一)는 성주 출신으로 입교하여, 부유한 재산을 친척들에게 분배해주고, 산중에 들어가 은수생활을 하다가 박해가 일어나자 순흥(順興) 「곰직이」(洞名)로 피하였다가 안동 포교에게 잡혔다.
◇또 한 분 유명한 신자 김 <암브로시오>(金君美)는 한국 천주교 창립을 선언하던 집주인 <도마> 김범우(範禹)의 친척으로서, 초창기에 입교하고, 게속해서 일어나는 박해를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지방교우들을 찾아 권면하다가, 이번 박해에 안동(安東) 판관에게 자수하였다.
이상 여섯분의 용맹한 천주의 용사들이 대구 감영으로 어송되어, 옥중생활 10여년 끝에 마침내 1839(己亥)년에 순교하였다.
■ 韓國교회 창립과 첫 受難
◇창립과 함께 갖은 박해 속에서 자라게 된 한국교회는 1795년 1월에 처음으로 중국인 <야고버> 주(周文謨) 신부를 맞이하기까지 만 10년 동안 잡라적으로 포교운동을 전개하여, 4천명의 신도를 얻었고, 주신부는 6년 동안 숨어서 경기, 충청 전라도를 순회하며 전교한 결과, 1만명의 신자를 얻게되었다.
◇신유년 대교난으로 한국 천주교는 표면상으로 전멸상태였으나, <베드루> 신(申大輔) <이여진> 이(李汝眞) 등 남은 신자들이 교회 재건(再建) 계획을 세워, 북경교회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동안 박해의 여왕(女王) 김대비가 죽고, 순조의 왕비를 안동 김씨 가문에서 책봉(冊封)하게 되어,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었다.
■ 殉敎者의 피는 信仰의 씨
◇영남지방에는 교회 초창기에 널리 학자들 사회에는 침투되지 못하였던 것인데. 신유대교난과 그 후 충청도지방 박해로 많은 피난 신자들이 경상, 강원지대로 흩어져 복음의 씨를 뿌리게 하였던 것이다.
1815년에는 주로 경상도 여러 고을에서 박해가 일어, 3백여 명의 신도가 채포되고, 그 중 백명이 대구감령(大邱監令)으로 이송되어 29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경상도의 이 첫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또다른 지방으로 피난하여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를 뿌렸으니. 박해의 마수(魔手)가 처녀지 영남지대에 뻗혀, 성풍(腥風)의 회오리를 일으킬 그 동안, 젊은 투사 <바오로> 정(丁夏祥)는 56차 북경원로를 거듭하면서 한국교회 독립을 운동하였다.
■ 한국교구 設定과 神父入國
◇국내의 여러 지방에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정하상(丁夏祥) 유진길(劉進吉) 등은 동분서주하며 부단 노력한 결과, 교황청에서 한국 교회를 독립교구로 설정하고, 프랑스 「빠리」외방전교회에 포교를 의뢰하게된 것이 1831년 9월9일이었다.
신설교구의 제1대 감목 <발도로메오.부르기엘>(蘇) 주교가 입국 도중에 병사하고, 1836년 1월에 <모방> (羅) 신부가 입국하여, 35, 6년 동안 외로이 버려두었던 한국교회를 담임하였다.
<모방> 신부는 입국 즉시로 본방인 신부 양성을 급선무로 알아,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재(崔方濟) 등 세 사람의 학도를 「마카오」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1837년 1월에는 <야고버.샤스당>(鄭)신부가 입국하고, 그 해 12월 제2대 감목 <노렌조.앙베르>(笵) 주교가 입국하여, 비로소 독립교구의 면목을 갖추었다.
<모방> 신부와 <샤스당> 신부가 남한 1대를 무대로 하고, 1839년에 체포될 때까지 열심히 선교하였다.
■ 경상도 布敎의 使徒들
◇<샤스당> 신부는 주로 경상·전라지대에 <모방> 신부는 경기, 충청지대에서 활약하다가 1839년에 대교난이 일게되어, 먼저 <앙베르> 주교가 체포되고, 옥중에서 서간으로 두위 신부의 자수(自首)를 종용하였다.
세 분의 성직자와 교회 중추인물들이 전부 체포되어, 서울에서 만 백여 명의 순교자를 내고 지방 각처에서 무수한 신자가 희생되었다.
그 후 6년 동안 또다시 한국교회는 목자 한 분도 없는 고아(孤兒)가 되고, 요행난을 피한 신자들은 궁박한 산간벽지로 은신하였다.
◇1845년에 우리 유학생 중 김대건(金大建)이 신부가 되어 제3대 감목 <페리올> (高) 주교와 <다벨뢰>(安) 신부를 뫼시고, 환향하였다.
그리하여 <다벨회> 신부는 경상·전라 지대를 김대건 신부는 부감목으로 경기·충청지대를 담임하였다가 김신부는 <페뢰올> 주교의 명령으로, 입국하는 신부들의 선로(船路)를 교섭하려 황해도 앞 바다로 갔다가 체포되어 1846년(丙年)에 순교하고, 그 이듬해에 <메스드르> 신부와 김대건과 유학갔던 <도마> 최(崔_九) 신부가 입국하여, 최신부는 호남과 영남지대를 담임하게 되었다.
◇1853년에 <페뢰올> 주교가 별세하고, 제4대 감목 <시메온.베르느>(張) 주교가 신신부, 박신부를 대동하고 입국하였다.
<베르느> 주교는 <다벨리> 신부를 보좌주교로 서품시켜 경상도를 담임케 하고, 최 <도마> 신부는 전라·충청도를 담임케 하였다.
◇<다벨리> (安) 주교가 처음 경상도에 전교할 때는, 산협지대인 상주, 영양, 안동, 성주 등 45 고을에 신자들이 있었더니 몇해 안 가서는 16, 7 고을에 고루고루 신자들이 펴져 살게되었으며 특히 양산, 동래(梁山·東來)지대에 교세 날로 융창하여 <다벨리> 주교는 3삭 동안에 2백30명에게 성세를 주었고, 여러 곳에서 주교를 초빙하여, 자원 영세하는 일이 많았을 뿐 아니라 대구에까지 전교하여 장차 대구교구의 터전을 닦았던 것이다.
혹심하던 박해가 철종(哲宗) 제위시에는 잠시 소강(小康)하여, 교회는 번성하고, 그동안 외국 선교사 10여 명이 입국하였다.
■ 丙寅년 교난과 嶺南지방
◇1864년에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高宗)이 왕위를 계승하니 나이 어려 그 친부 대원군이 섭정이 되어, 한 때 아라사(_西亞) 세력을 막기 위하여, 천주교 선교사를 이용하려던 남가일몽(南柯一夢)을 꾸다가, 청천벽력의 쇄국학정(鎖國虐政)으로 돌변하여 전무후무한 박해명령을 선포한 것이 1866년이니 이 박해가 소위 병인(丙寅=1866년) 양요(洋擾)로서 2위 주교와 8위 신부와 2천여 명의 교도를 학살한 가장 혹독한 교난이다.
이 교난에는 경상, 전라지대에서도 박해가 혹심하여, 경상도에는 예천, 밀양, 상주, 문경, 통영, 동래, 울산, 경주, 언양, 진주, 성주 등 여러 고을에서 많은 교우가 잡혀 혹은 지방관현에게 참살되고, 경북 여러 고을 신자들은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하고, 상주에서는 18명의 순교자가 났다. 전라도에서도 전주에서 11인, 여산(驪山)에서 17인, 나주, 진산, 금산, 고산 등지에서도 많은 순교자가 있었다.
◇병인년 박해 직전에 경상도에는 <리델> (李) 신부(후에 제6대 감목)가 담임하여, 거제도에까지 전교하였고, 박해가 일어났을 때 <리델> 신부는 대구 근처에서 전교하다가 <베르느> (張) 주교와 <다벨리> (安) 주교가 잡혔다는 소문을 대구에 와서 자세히 듣고 충청도로 피하여 강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피신했다.
1876년에 <리델> 신부는 제6대 한국 감목이 되어 <불랑> (白) 신부와 <도그엩> (崔) 신부를 먼저 입국시키고, 그 이듬해 9월에 <가밀로> 정(丁) 신부와 <아킬레오.로벨> 김(金保祿) 신부를 대동하고 한국에 재입국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리델> 주교는 중국으로 추방되고 <불랑> 신부가 감목대리로 교회사무를 담당하였다.
■ 로벨트 神父의 大邱 부임
◇1880년에 8대 감목이 되실 <아오스딩.뮤델>(閔德孝) 신부가 입국하여, 5인의 신부들이 각기 전교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1886년에는 마침내 많은 순교자를 내게 한 「프랑스」와도 수호조약이 체결되니, 국내에 숨어 살던 신부들이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1884년 6월 추방되었던 <리델> 주교가 서거하고 <불랑> (白)신부가 7대 감목으로 승품되었으며 1886년에 <로베르>(金保祿) 신부는 경상도의 담임으로 <가밀로> (丁) 신부는 전라도 담임으로 각각 부임하였다.
◇경상도 담임으로 부임한 <로벨트> (金) 신부는 아직 지방 사군난(私窟難)으로 위험하던 대구 도심지대로 들어오지 못하고, 칠곡 신나무골(漆谷蓮花洞)에 잠거하면서, 교촌(敎村)인 「한퇴」(同郡東明面得明洞)에서 대구 성안신자들을 돌보았다.
◇1889년 <로벨드> 김신부는 대구 근교 새방골(現竹典洞)로 옮기며, 초가 한 채를 사서 성당을 꾸미고, 밤으로는 변장을 하여 대구 성내로 들어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1891년 <로벨트> 신부는 읍내로 옮겨 위선 대야불(現達城洞) <바오로> 정(承旨=郡圭각)씨 집에 임시 처소를 정하고 7년동안 우거하면서, 현 대성당이 서 있는(桂山洞2街70)지대를 매수하여, 즉시 신부 사택을 건축하고, 순 한국식 와가 성당을 십자형으로 지어 1899년에 <뮤델> 주교를 초청하여 장엄한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성당은 이듬해에 화재로 소실되고 현 대성전을 착공하여 1902년에 준공하였다.
대구교구 창설자 <풀로리안.데망즈> (安)주교
대구교구 역대 감목 -제2대감목 <뭇세>(文)주교, 제3대감목 <하야사까> 주교, 제4대교구장 <바오로> 朱신부, 제5대감목 <요안> 崔주교
영남의 사도들-복자 <샤스당> 신부, 다벨라(安)주교, 리델(李)주교, 로벨트(金)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