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수필] 젖엄마 따라간 밤
발행일1961-12-25 [제308호, 6면]
내 나이 벌써 육십 삼세. 성탄을 지내고 새해가 오면 벌써 육십사세가 된다. 내 반생을 통하여 성탄에 대한 회상은-내가 입교하기 전 적어도 육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주자골(鑄字洞)에 살았다. 지금은 집터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우리집 뒷곁 수유나무 위에 올라가면 남쪽으로는 왜장터(倭珹台)가 가까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종헌뾰죽당(明治聖堂)이 우러러 보였다. 바로 지금의 일신국민학교(日新國民學校) 북쪽이며 중부경찰서(中部警察署) 동쪽이었다. 나는 십오남매 중에 큰아들이었으나 내 위로 삼형제나 조졸(早卒)하여 우리 집에서는 아들 기르는데 몹씨 마음을 썼는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애기만 나면 백일도 못가서 간기(肝氣)를 일으켜 죽고마는 까닭이었다. 넷째로 태어난 나에게 대하여는 어머니는 물론 할머님이 몹씨 조심을 하셨다.
첫째 내가 태어나는 즉시로 핏덩이 아이를 왲ㅇ이 속에다 콩(豆)을 깔고 그 속에다가 일단 넣었다가 꺼냈다. 오쟁이라 함은 볏섭을 적게 만든 것이다. 아마 어느 무당이나 점쟁이가 그렇게 해야 장수(長壽)한다고 일러주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나의 아명(兒名)은 오장(五章)이로 지어지고 오쟁이 속에 넣었던 콩은 시골 밭에 심어서 해마다 추수를 하였다.
또 한 가지는 젖 어머니(乳母)를 둔 것이다.
내 조부(祖父)는 검소(儉素)하기로 유명한 분이었는지라 유모를 두는 것을 과히 좋아하지 않으셨으나 하두 손자가 여러 차례 죽으니까 특히 허락을 하신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날때부터 젖어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바로 이 젖어머니가 천주교 신자였던 것이다. 그때쯤 이미 천주교를 탄압하던 대원군(大院君)도 실각(失脚)을 하고 종현고개 위에 드높은 뾰죽당이 세워진 때이다. 내 젖어머니도 성당에 나아갈 수 있었는가보다. 그러나 유교를 숭상하시던 내 조부가 그것을 좋아할리가 없다. 내 젖어머니는 우리집에 올 때는 몸고상을 벗어놓고 드나들었으며 천주교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지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젖어머니는 내가 두 살 세 살 때부터 날씨 따뜻한 주일에는 나를 업고 미사 참례를 했었단다. 나는 일곱살, 여덟살적 생각이 어렴풋이 추억된다.
젖엄마를 따라간 날은 성탄날 밤이었다. 수박 등을 줄줄이 늘여 불빛이 아름답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돌함에서 성수를 찍어 내 이마에 뿌려주시던 생각도 새롭다. 좀 더 커서 열 살 때쯤 해서는 곧잘 앞장을 서서 성당에 가기도 했다.
그 때 명동성당에는 박경호씨라는 분이 회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사 중에 그분이 일어나 성경을 읽으면 음성이 울려서 어쩐지 고개가 수그러지던 일도 생각난다. 모두들 박경호씨를 존경하였고. 그의 전가족이 온통 천주교 교우이였으며 재산이 많은 분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하니 대구(大邱)에서 서씨(徐氏)의 일문(一門)이 천주교에 입교해서 유명했듯이 박경호씨 일족도 또한 그러하였나 보다. 그러나 어렸을적 추억인지라 장담을 할 증빙은 없다.
어느 해인가 따뜻한 성탄이였다. 이날 밤에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난 내 당숙(堂叔)과 함께 성당으로 구경을 갔다. 내 젖어머니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젖어머니와 같이 갔을 때는 조심하여 일단 수박 등에 불켜는 구경만하면 젖어머니는 일단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자기는 다시 자시미사에 참례를 했으니까 아무일 없었는데. 우리끼리만 갔는지라 정신 없이 구경하는 동안에 밤은 깊었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지 않을리 없다.
『오쟁이와 억길이가 간 곳이 없다』고 야단이 났다. 억길(億吉)이는 내 당숙의 아명이다.
『필경 유모를 따라 뾰죽당엘 갔을 것이다』
라는 결론이 내려… 내 조부는 내 조모에게 야단을 치고 내 조모는 내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뾰죽당으로 달려와서 남이야 듣던 말던 함부로
『오장아!』
소리를 쳤다. 마침내 나는 집으로 붙들려오고 내 젖어머니는 즐거운 성탄날 축복은 커녕 야단을 만나는 사태를 일으키고 만 일이 있다. 그 이튿날 젖어머니는 나를 보고 한 말이 있다.
『너는 크거든 꼭 천주를 믿어라. 그래야 천주님의 강복받아 잘 살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쩐지 몹씨 두려웠다. 모슨 큰 비밀이나 지니구 있는 것 같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계신 할아버지를 똑바루 대하기가 무척 송구하기도 했다. 비단 성탄날 뿐이 아니라 나는 언제나 명동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젖어머니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이 원고를 쓰는 전날 오후에 똫나 그러하였다. 이제는 어느 곳에 묻혀 잠드셨는지. 그 자손은 어떻게들 지나는지 소식조차 모르고 있으나 나는 언제나 주일이면 명동성당에 나아가기를 좋아한다. 본당에 가는 회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명동성당 언덕을 오를 때마다 나는 번번히 젖어머니가 남겨둔 발자취를 찾는 마음 간절하다.
『어머니! 나는 어머님이 일으신대로 천주님을 경배하러 이곳에 나왔읍니다.』
스스로 마음이 황홀한 적이 많다. (이것은 내가 젖어머니를 추억하는 둘째인 글이다.)
(筆者 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