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35) 베니 아베스 주변의 싸움 ③
발행일1962-06-03 [제329호, 4면]
리요디이는 이렇게 말했다. 『일요일이었다. 나는 우리들이 그의 미사에 참례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성당은 땅을 다지고 지은 생연와(生煉瓦)의 벽으로 된 소규모의 보잘것 없는 토막이었다. 거기에는 아라비아인이 5·6인 있었으나 개종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신부는 이 점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압력을 주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그의 성덕에 이끌려서 온 것이었다. 맨나무로 만든 테불에 불과한 소박한 제대앞에서 광명과 신앙에 가득찬 열성으로 황홀하게 희생물을 바치고 있는 신부 앞에 우리들은 일종의 종교적 감동 위대한 존재에 대한 감정을 맛보았다. 가장 호화로운 대성당에서 장엄한 예절의 화려찬란한 것 앞에서는 결코 맛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화려한 것을 대단히 좋아하는 리요디이는 가난한 모습 속에 감추어진 위대성을 인정할 수가 있었다. 「베니 아베스」 주변의 오아시스에 여기저기 전화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그는 거의 무종교로 살고 있는 노예들을 위해서 일종이 교리문답책을 만들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서 보리와 야자열매 이외의 것을 얻그려고 하고 있을 것이랴. 어느 누가 정신적인 빵에 대한 굶주림을 가지고 있으랴. 그런 사람은 대단히 적었다. 그래도 좋다. 단 한 사람의 영혼을 예수의 사랑에로 인도하는 것도 전생애를 희생으로 할만한 가치가 있다. 신부가 쓰고잇던 것은 교리문답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도자를 위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여러 진리를 되도록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하라위 불쌍한 흑인에게 소개하는 복음서』라는 제목 이상으로 소박한 것은 없다. 그것은 참으로 빈한하며 또한 『자부(慈父)주의적인』 인상까지도 주는 것이다. 이 이상으로 『화려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영적문제를 취급하는 어떠한 저서도 아마 이만치 자부(自負)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외관은 그의 오두막집성당 만큼이나 빈약하다. 그러나 그만치 그 작품은 감추어진 미(美)에 가득차 있다. 그가 말할 때 『불쌍한 흑인』이라는 말 속에는 사소한 경멸의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천주 앞에서는 그는 자기 자신을 흑인노예 가장 미천한 자 보다 낮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신부는 노예들에게 생명의 말씀의 조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스스로 선택하고 분류하고 다시 쓴 복음서의 문장 속에서 직접 끄집어 내온 마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그들에게 얘기하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의 경험의 비밀을 그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대목은 논문이라는 어마어마한 형식으로 그의 내심의 비밀을 명백히 하고 있다. 즉 폭발적이며 무한한 순명(順命)의 비밀을 신부가 자기 자신이 쓰기 위항 메모에 적어놓은 것과 『가련한 흑인』을 위해서 쓴 것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리스도교에는 소박한 사람을 위해서와 학자를 위해서의 두가지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순명하는 것 그것은 귀로 듣고 실행하는 것이며 유일한 진리를 귀로 듣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엠프렘」과 「파레스티나」에서 심령 수업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이미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예수) 원하는 모든 것을 원하라 내가 워하는 한에 있어서 내가 원하는 그대로 「성부여 네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 기구는 하늘에 있어서 영원히 내가 부르짖는 기구가 될 것이다. 천주께서 원하는 모든 것 따라서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이 「성부 네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중에 포함되어 있다.』
순명하는 것 천주앞에 소멸할만치 자기를 없게 하는 것 이것은 그의 사상의 불면하는 모티브이다.
1903년 그는 게랑 주교에게 이렇게 썼다.
『십자가의 성 요왕이 주의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사람을 위해서 가장 봉사하고 세상을 구원하신 것은 그 최후의 굴욕 죽음의 때였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 내가 십자가를 참으로 사랑하는 은혜를 빌어주십시요.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선을 하는데 없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십자가를 겨우 조금밖에 지지 않고 있읍니다. 나는 비겁합니다. 사람들도 나에게 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은 없는데 … 그리고 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회심을 위해서 내가 예수를 사랑하고 항상 성심에 가장 합당한 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기구해 주십시요… 아멘.』
그 이듬해 1904년 『베니 아베스』에 있어서 피정묵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하고 있다. 『순명은 사랑의 척도다. 완전한 사랑을 갖기 위해서 완전히 순명하라』 신부의 문장에는 몇차레나 되풀이 하여 『내 뜻대로가 아니라 네 뜻이 이루어지기를』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있다. 이러한 말은 우발적으로 표현된 것도 아니며 고통 앞에서 단지 체념하기 위한 말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말이며 성서 전체의 주도적인 모티브인 것이다.
예수께서 종도들에게 가르치신 기구 『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 또한 이루어 지이다.』의 진수인 것이다.
어떠한 성인도 이 이상의 금언(金言)을 가지고 있은 일은 없었다. 인간의 볌용은 고행과 법열(法悅)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선행에 의해서 이루어진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의지가 천주의 의지 속에 녹아들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천주께 복종하는 것 그것은 단지 도덕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천주의 말씀에 살고 천주의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수년 이래로 샤르르 드 후꼬오는 자아를 잊어버리고 순명 속에 자기를 던지고 있었다. 그는 회심하자마자 수도자가 되려고 생각했엇다. 수도원에서는 천주께서 그에게 기대하던 이상으로 처주의 의사에 순명하는 것이 확실하지 못한한 그는 아무데서도 휴식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므로 또한 그는 결코 자기 순명의 유일한 판정자가 되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의 근처에서 천주의 권위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 그의 영적 지도자인 유브랑 신부와 라나피스트회의 여러 수도원장들, 그리고 게랑 주교 등의 판단에 자기의 내적 영감을 복종시켰다.
샤르르 수사가 가르치는 것도 신앙이 가장 순수한 사명이다.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그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종교가 세상의 철학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종교는 생명은 계시인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다만 어떤 인생관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발전하는 이 거대한 신뢰와 사랑의 그물 속에 사랑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신부는 여기서 그 수도자들에게 순명의 완전성을 구하는 방법 즉 영적지도자에게 복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지상에 있어서의 천주의 나라인 가톨릭종교는 사람들에게 천주의 이름으로 천주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바 전부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종교가 모든 사람에게 일반으로 명하고 권고하지 않고 그 개인개인을 부르는 것 즉각 사람의 개인적 성소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종교는 모든 사람의 생활의 일순일순을 그 사상 언어 행동의 모든 것을 지도하고 천주께서 그 사람을 부르시는 생활의 양식과 그가 행하는 것 원하는 것 모든 행인을 각인에게 지시하는데 이것은 (영적) 지도라고 하는 것이다. 지도는 또 훌륭한 사제로부터 각인에게 개인적으로 행해진다. 가톨릭종교의 가르침도 성인이 되기에 불가결한 방법니다.』
이 말들은 엄격하며 요구가 많다. 아마 개종하는 자의 수효가 대단히 적은 때에 『가련한 흑인』들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려고 하는 것은 신부가 너무도 이상가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때 그가 양도하는 것은 그 자신의 비밀인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와같은 길에 그들을 끌어들이려는 계획이 공상적이라고는 하더라도 역시 예언적이라는 것이며 확실히 그점이 가장 몽상에 흡사한 점인 것이다. 즉 신부의 최대의 역설은 사람들을 개종시키지 못하는 대신에 영적지도를 했다는 것이다. 다만 가톨릭신자에게 대해서 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 교도인 그의 친구 회교도들에 대해서 더욱더 그러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시작했으며 앞으로 더욱 더욱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