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91) 金浦(김포)본당
「김포」공항 굽어보는 곳
성당건축은 해병용사들이 했고
구호활동 양재학원은 칭찬받아
발행일1961-12-25 [제308호, 7면]
산봉우리에서 바라보면 김포공항 하얀 활주로에 비행기가 미끄러지다가 날라가 버린다. 물구비가 좁아든 한강 하류를 끼고 옹기종기 모인 부락을 구버보며 높이선 여기는 경기도 김포면 김포천주교회.
지금부터 7년 전 그러니까 현재 이 건물이 서기 전에 열두간 구(舊)가옥을 임시성당으로 쓰고 있을 시절에 이 성당에 이야기꺼리가 될 일대 춘사(椿事)가 발생했었다.
당시 주임신부로 계시던 <베드루> 김신부님은 서울로 피정을 떠난 뒤 장마가 계속하던 7월 어느날이었다. 폭우가 좀체 멎지를 않더니 갑자기 천지가 쏟아지는듯한 벽력같은 소리와 함께 성당 뒷산이 일시에 무너져버렸다. 달려온 동민들 눈앞엔 무너진 산데미뿐 성당은 흔적도 없었다.
성당 뒷방엔 80난 신부님의 양친만이 남아 계셨다가 이런 참변을 당했던 것이다. 뒤미쳐 달려온 소방서원들과 동민들은 맹렬히 시체발굴 작업에 달라들었다.
『양친 사망 속래』의 급전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온 김신부님의 목전에 벌어진 이 참사! 양친이 계시던 방 부근의 낙반(落盤)을 겨우 제거하고 보니 이게 왠일일까? 주위를 둘러싼 군중들은 일시에 환성을 올렸다. 백발의 두 노인이 제대 있던 쪽을 향하여 단정히 꿇어앉아 묵주를 헤이며 신공을 드리고 있지 않는가. 제마다 끔찍한 참상을 머리 속에 그리며 있던 그들에겐 이것은 꿈처럼 믿어지지 않는 신기한 관경이 아닐 수 없었다. 두 노인이 계시던 방 한쪽 벽은 반이 무너지고 부러진 기둥하나가 이 벽을 고우고 있었다. 제대방을 파보니 성물 역시 그대로 보존되여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많은 사람들이 성당으로 몰려들어 구령을 청하고 영세를 받았다. 사건 전까지는 당시 김포 부락엔 교우가 하나도 없었고 거기서 약 5리 떨어져 있는 걸포리(傑布里)란 동리에 약간의 교우가 있었을 뿐이었다.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산과 12간(무너진)의 집을 매입하여 성모성심을 주보로 모시고 <분도> 김신부님이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얼마 후 6·25 동란을 겪고 피난하였다가 복구되어 <베드루> 김신부님이 그대로 오신 것이다. 1957년 산을 깎고 성당 신축공사가 시작되였는데 이 공사에 당시 김포에 주둔한 해병대 장병들이 「불도쟈」 및 많은 차량을 동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끝에 이듬해 지금의 성당건물이 드디어 준공되었다. 그 후 <누가> 신(申仁植) 신부님이 맡으셨고, 작년에 <미가엘> 전신부님(美人)이 오셨다. 신부님은 강당을 증설하여 여러 단체 회합과 교리반을 지도하시고 지금은 양제학원을 신설하여 이 강당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작년 12월10일에는 20명의 기술자를 양성하여 실사회 직업여성으로 손색 없는 기술자를 만들어 졸업식을 올렸다. 앞으로는 외국에서 편물기계를 도입시켜 양제학원 규모를 넓힐 것이라 한다.
전신부님은 한편 극빈자 구제사업도 하고 있다. 난민수용소를 후원하고 불쌍한 환자들에게 약을 무료로 주고 중환자는 입원을 시켜 비용을 부담한다. 김포성당은 지금은 5개소의 공소를 가졌으며 1,263명의 교우와 500명에 가까운 예비신자를 가르치고 있다. 앞으로 시급한 문제로는 몇개소에 공소를 증설할 일이며 이곳에다 공소 강당을 신축할 예정이다. 이 젊은 외국신부님의 포부는 이렇게 쉬임 없이 착착 실현되어 가고 있어 김포성당의 쇄신 증진하는 혁혁한 모습은 경의의 적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