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공의회 제1차 회기의 성과(成果)나 그 자체를 두고 논평할 시기는 못 된다.
도대체 2개월간의 공의회의 성과가 무엇이냐?하는 질문을 피할 길은 없다. 그 성과란 것이 당장에 코밑에 것을 말한다면 실망할수도 있겠다.
공의회 교부들은 2개월간 36차의 총회와 거기 부수되는 수많은 분과위원회를 거듭했다. 그 연설번수로 말하면 6백회를 넘었다고 하니 하번총회에 평균 20여 명이 등단한 셈이다.
각 총회 시작의 미사는 10수종의 다른 전례(典禮)로 봉헌되었다. 제1차 회기의 절반은 교회의 공식예배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여 필요한 수정 개정을 가하고 실무 위원회로 회숭했다.
두 번째로 제의된 것이 유명한 계시(啓示)에 관한 의안(議案)이었다. 이 문제는 약 한주일의 토론을 거쳐 의안 자체에 대한 신임을 묻는 결정적 투표를 한 결과 불신임을 받고 말았다. 그 다음 상정된 것이 신문방송테레비 하는 「매스·콤」 문제였다. 이 문제의 상정은 폭풍을 진압시킨 듯했다. 실상이 「매스·콤」 관계에는 큰 관심을 보내지 않았다.
그다음 제1차 회기의 종결단계에 들어서면서 동방이고(難敎)에 관련된 문제가 토의되면서 동정 성모에 관한 의안(議案)의 상정을 보게 되었으나, 이 또한 의안 자체가 기부되었다. 이러는 중 「교회의 성질」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정식으로 상정되어 긴장된 분위기를 다시 재연시켰다.
전례에 관한 문제는 각 항의 채택이 거의 만장일치로 찬성되었다. 그런데 여기 관해서도 주목할 것은 도움ㄴ제에 포함된 진리 및 교회 안에서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결정 등만이었다. 가령 교회의 전례 중 모국어 사용에 관한 시안(試案) 등은 상정되지도 않았다.
많은 공의회 교부들은 여기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종전대로(STATUS QUO) 시행되기를 바라거나 모국어의 사용을 주장하는 두 갈래의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11월21일(1962년) 수요일은 1차 회기의 「크라이막스」를 자아낸 날이었다. 공의회 교부들은 계시에 관한 의안을 수락하느냐 거부하느냐 그 어느 한쪽을 투표로써 결정한 날이다. 의안의 수락을 찬성하는 측은 교리의 비타협성(非妥協性)을 주장한다. 한편 거부하는 측은 첫째 그것이 비(非)가톨릭에 던질 영향을 생각하고 또 그것이 과거 50년간의 신학 및 성서연구의 발견들을 도외시한다는데 있었다.
약 1,300의 투표참가에서 거부(拒否)의 찬성에 800표가 던져졌다. 이 투표 결과는 과반수의 공의회 교부들이 진보적인 견해를 지지한 것이다. 이로써 현대적응(現代適應)에로 향한 첫단계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요안성하의 뜻이기도 했다. 투표의 결과를 보고한 저명한 신학자는 『지금까지 몹시 적정했다. 이제 즐겁게 아주 딴 사람이 되어 귀국한다』고 했다. 어느 보수주의자는 『압흑의 수요일』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두 달 동안의 성과로는 극히 저조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 많은 비용을 들여서… 교구의 시무(視務)를 중지하면서…라고 한다면 그렇게 느껴지는 점도 없지 않다. 만일 1차회기에 전의의(全意義)를 붙인다면 실패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중대한 것을 보지 못한 단견(短見)이다. 그것은 1차회기의 부소산(副所産)이란 것이다. 이 부소산에 주목한다면 1차회기이말로 거대한 성공과 성과를 거두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 부소산에 언급하고자 한다.
①요안성하는 세계의 긴장을 완화(緩和)했다. 이것은 분명히 1차 회기가 달성한 큰 성과이겠다. 요안 성하는 그의 오랜 외교 경력을 통해 「바티깐」 관리들이나 「로마」의 어느 신학자보다 세계 정세를 통찰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 없다. 5억이 넘는 가톨릭 신자들이 평화 및 긴장에 거대한 요소가 되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톨릭의 신학 전례 정치사상 및 그밖의 종교활동은 세계 평화에 중대한 관련을 맺고있다. 이런 사실을 가톨릭의 자부(自負)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기에는 거기 따르는 책임의 주앧한 것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가톨릭 사상가(思想家) 지도자들 가운데는 어떤 자기들만의 담을 쌓아 올리고 있는 일이 없지 않다. 그런 답 안에 비타협의 신학 대사회적(社會的) 태도를 잡아 갖추고 있다.
그같이 견고한 울안은 방호(防護)에 편하고 유리할 수도 있으리라. 바깥의 회의(懷疑)와 불안이 감돌고 있을때도 문단속만 잘하면 안이(安易)하게 잠겨있을 수 있으리라.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분들이 오늘의 교회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교회 밖의 소리는 큰 경고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귀를 기울이고 있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이다.
또 교회 안에서의 문호개방(門戶開放)을 외치는 소리도 자못 높은 것이다.
전례 신학 성서연구 그밖의 정치행동에 있어서도 거기 올려지고 있는 경종(警鍾)은 무엇인가. 그것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 제1차 회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연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제 그 중대한 부성과(副成果)를 평가해 가야한다(未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