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36) 베일을 쓴 전사들
발행일1962-06-10 [제330호, 4면]
1902년의 3월, 돌연히 벤메시스라는 사람이 고오베 대위의 사무소에 뛰어왔다. 그는 노발대발 하면서 프랑스인의 전면적인 원조를 요구하러 왔다.
벤 메시스는 「터디이캘트」에 있어서 가장 초기의 유명한 프랑스 옹호자였다.
아라비아인을 아버지로 하고 투아레그인을 어머니로 한 혼혈아로 태어난 그는 순수한 투아래그인들의 멸시를 받고 있었다. 그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그들에게 보복하고 있었다.
96년에는 공공연하게 모래스를 살해한 자들에 대항해서 대대적으로 고발하고 이 탐헌가의 유골을 「쥬니지아」로 가지고 왔다.
이번에는 그가 여행하는 동안에 공격대의 일원이며 인척관계에 있는 투아레그인의 유명한 세력자 바바 아그 다마 그라스트가 공공연하게 벤 메시스의 처를 편대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티디캘트의 모든 오아시스에서 커다란 추문이 되었다. 왜냐하면 벤 메시스는 투사로 알려져 있으며 혈통의 반만 투아레그인이라 할지라도 그는 유부녀의 명예를 손상케 하는 것은 결단코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모욕을 씻기 위해서는 피를 흘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모욕당한 사나이에게는 제 말을 듣는 일족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바바의 공격에 대항하는데 혼자밖에는 없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프랑스인 뿐이었다. 이제 프랑스인이 참으로 그의 친구인가 어떤가를 알게될 것이다. 고베 대위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지금까지 그는 「인사라」의 평화가 직접으로 문란해지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투아레그와 아라비아인의 개인적 분규는 그들 자신이 해결하도록 일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규군의 일대를 동원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사건을 자기의 오른팔과 같은 코도네 중위에게 위임했다. 3월 22일 중위는 벨 메시스와 귀순한지 얼마 안되는 아라비아인과 벨베에르족 중에서 지급히 모병한 전원이 토민병으로 된 낙타병 백30명을 이끌고 사막으로 뛰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바바를 추격하는 제멋대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7주일간 걸려서 이 반공격대는 호가아르를 횡단해서 천7백키로의 길을 헤맸다.
5월 7일 돌연히 「호가아르」의 「팃트」에서 고도네 소대는 바바 및 시디 모하멧트, 아그 오토마아느가 인솔하는 3백명의 「투아레그」 낙타병의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편은 무기가 우수했으므로 대단히 유리했으나 「루아레그」는 거의 삼배나 되는 인수이며 장대한 용기로 공격해왔다.
소총전이 몇시간이나 계속했다. 별안간 고도네는 포위될 위험에 빠졌다. 벤 메시시와 반공격대의 전원이 큰칼을 빼들고 「투아레그」에 돌격했다. 복면병은 백50명 가까이 죽었다. 나머지는 산산히 도망했다. 고도네의 낙타병은 사망자 4명 부상자 9명이었다. 중위 자신도 부상했다.
그를 지키려고 그 앞에 몸을 던진 한사람의 「샹바」의 혜택으로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 무적 「투아레그」란 전설은 파괴되었다.
『「투아레그」의 장애물이었던 이 신기루는 사람이 근접하자 소멸하고 말았다. 사하라의 정복은 이렇게 해서 수도에서는 아무도 그 실현을 바라지도 않고 준비도 주의도 하지 않는데 거인적이라고 생각되는 기도가 우연히 실현하였다는 유례가 없는 성격을 띠고 있다.』
고오체는 『사하라의 정복』에서 이와같이 쓰고 있다. 사막의 군주들은 그 용기에도 불구하고 넋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자기네들 지역 안에서 이와같은 패배를 맛본 일은 없었으며 별로 호위도 데리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 교도들이 자기네들의 산을 마음대로 다니는 것을 보고도 그들을 모두 학살하지 않고 버려둔 일은 없었다.
1902년까지는 어떠한 것도 그들의 의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티트」의 전쟁 하나로서 모든 정세가 번복된 것이었다.
「호가아로」는 한창 혁명 도주이었다. 공격대의 위대한 조직자이며 그 용기와 지성으로 유명한 젊은 투사 뭇사 아그 아마스타라느는 강화할 결심을 했다. 그리고 만일 불명예스러운 조건이 아니라면 프랑스인과 절충할 생각이었다. 리요디이와 같이 라페리이느도 힘과 질서를 강조하며 공통적인 행복을 위해서 쌍방이 신뢰할 수 있는 공평한 협력을 바라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담판은 이미 모든 사하라의 인심을 뒤끓게 하고 있었다.
1903년 6월 그는 라페리느에게서 「투아레그」에 관한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특히 이러한 뉴스를 몇번이나 다시 읽었다.
『프랏델 사절단을 학살할 당시 투아레그 족의 고귀한 가문출신의 한 부인이 대단히 훌륭한 행동을 했읍니다. 그는 부상자들을 처치해버리는 것에 반대하며 그들을 자기 집에 데려다 간호를 하고 「암깃드」전투에서 부상하고 돌아와 제 손으로 그들을 처치하겠다는 아지시를 그 여인은 자기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부상자들이 회복한 후에 트리폴리로 돌려보내 주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40세나 43세 정도이며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자선으로 인해서 칭찬을 받고 있읍니다.』
그 여자는 「아넷트」의 투아레그인 타이토크족이며 다이샷트 울트리브다가아느라는 이름이었다.
사르르 수사는 기쁨에 넘쳐서 회교도이 부인에게 편지를 쓰려고 생각하고 게랑 주교에게 허락을 받는 편지를 쓰기 전에 일기장에 그 초고를 썼다.
『종교의 제일의 계명은 마음을 다해서 천주를 사랑하는 것이며 제이는 모든 사람들을 예외없이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사람들에게 그처럼 훌륭히 자선을 행한데 감동되어 천주께 감사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읍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당신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들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 있어 서로 수도자와 수녀들은 모두들 당신의 얘기를 듣고 당신의 덕행을 천주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당신이 이 세상에서 은혜에 충만되고 천당의 영광에 가득차기를 기구할 것이며… 나는 또한 당신도 우리를 위하여 기구해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당신 마음에 천주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뜻을 주신 천주께서 당신의 기구를 버리실이가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듀베리에 모레스가 죽은 후 라페리느의 편지는 그에게 결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한 인간이 쓴 정다운 편지 속에서 샤르르 수사는 천주의 뜻을 보았던 것이다. 드 후꼬오 신부의 생애에는 아무런 기적도 없다. 그에게는 단지 눈앞에 천주의 편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저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침묵하고 있는 다이샷트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그 여자의 주위에는 깊은 사막 속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한민족 전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샤르르는 「호가아르」에 가는 허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신부인 것이다.
은둔소의 위대한 침묵 속에서 한마디 말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무언의 질문이 그를 뒤흔들었기 때문에 그는 전심전령으로 『네』하고 대답했다.
그는 모록코를 포기하고 「호가아르」에 갈 준비를 했다. 이미 그는 그 생의 새로운 프로그람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투아레그 사람들 사이에 되도록이면 그 중심지에 자리를 잡을 것. 거기서 기구하고 언어를 연구하고 복음서를 번역하리라. 그들과 교제하고 울타리 없이 생활하리라. 매년 고해성사를 받기 위하여 북부에 가자 가는 도중 모든 숙영지에서 성사를 중고 지나가는 길가의 토민들에게도 천주께 대한 얘기를 하리라』 출발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불안에 가득차 있었다.
『나는 부름을 받았으며 기다려지고 있다. 나의 본성은 극단으로 이것을 꺼리고 있다. 나는 -부끄러운 일이나- 베니 아베스의 제대 밑에 있는 평화와 작별하고 나그네 신세가 된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 그때문에 지금 대단한 혐오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할 권리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하고 토민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우정과 신뢰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는 역시 게랑 주교와 유브랑 신부에게 허가를 청하고 있다.
2·3일 후에 그는 법규에 의한 긴 시련의 시기는 지나갓다는 호의에 가득찬 답장을 그 두사람에게서 받았다. 라페리느는 라페리느대로 행정상의 허가를 주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드 후꼬오에게 티디켈트에 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1903년에 그는 테디노 대위에게 편지를 쓰기를 『나에게는 그러한 권한은 없으나 부대로부터 비난과 협박을 받으면서도 모든 사관들에게 지지를 받는 편지로써 여전히 잘 해가기를 희망하고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