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일신(又日新)의 심향으로만 저를 다스려 갈 수 없는 어느 범상(凡常)한 생활에서도 새해 새날의 감명은 새로움에 여지 없이 안아다주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다. 그것을 서정(抒情)이라 해도 좋고 인식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뿐이 아니다. 우리는 준성사(準聖事)의 심태(心態)를 알고 있다. 정녕 축복을 받고 또 주는 우리의 첫날을 알뜰히 맞이할 수밖에 없다.
비롯삼과 마침이 없는 진리 그 자체를 소유한 감격이 곧 우리의 얼을 꾸미고 있다해도 동시에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고 또 그 빛의 굴사(屈射)를 걷잡지 못한다. 그 때문에 때로는 불신자(不信者)와 같이 불안해하고 모든 인간고뇌를 달관(達觀)한 자와 같이 떨어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한다. 한갖 우리의 자랑이요 큰 보람이 있다면 그것은 고백(告白告解聖事)이다. 마음에 차여 울적이는 뭇 죄장(罪障)을 담담한 태도로 나아가 고백해 버릴 수 있는 특은(特恩)을 입은 자들인 것이다.
이에 더한 새로움이 또 어디 있을 수 있는가? 이에 더한 진정한 우일신(又日新)이 설정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재신(再新)된 마음으로 새날을 맞이하고 있다.
종적(縱的)으로는 비록 신심의 오롯한 정성을 치열히 북받쳐 울릴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만일 현실을 경륜(經倫)해 갈만한 능력과 준비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횡적(橫的)인 인간 및 사회관계를 도외시한 우맹을 범할 수밖에 없다.
56만 남직한 한 회중(會衆)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얼마쯤은 마땅히 할 일인지. 그 착실한 설계(設計)를 장만해 놓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여기 관심을 집중시켜야만 한다. 우선 그 설계를 말한다는 것은 연두에 건드려 볼만한 것인줄 안다.
먼저 안으로 재신과업(再新課業)이 과감히 수해오디어야 한다. 이것은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첫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극히 사소한 일부터 재신의 대의(大意)를 내걸 수 있어야 한다. 재신이란 뜻과 항용 쓰이는 재건이란 말은 그렇게 먼 것이 아닌상 싶다. 여기 소요되는 정신은 재래의 따분한 습관모병(習慣毛病)을 박차버릴 수 있는 용력(勇力)일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본당마다 그곳의 버리지 못하는 병패같은 것이 있다. 그런 것부터 자르듯 떼어버려야 청신한 기풍을 불어넣는 재신의 새 설계를 꾸며갈 수 있겠다. 이런 일은 오로지 그 본당의 소관이요 무슨 외력을 믿거나 도와줄 수도 없는 일이다.
다음은 밖으로 향한 일이다. 여기에는 고도의 그리고 더 치밀한 설계가 있어야 한다. 지난해 역사적인 한국 가톨릭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설 무렵 바티깐 방송은 『한국의 가톨릭 인구는 전체 인구의 불과 2%에 지나지 않지만 전체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논평했었다. 이것은 단지 방송논평이기 보다 한국 가톨릭에 중대한 지표(指標)를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가톨릭교회의 영향이 그 사회에 얼마만한 영향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 중대한 일은 없다. 역사철학자 니꼬라이.벨쟈에프는 이 관계를 무형(無形)한 교회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 일보다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지성과 행동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성 및 행동의 동원이 필요하고 거기 알맞는 방도를 모색해야만 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응(對應)할 수 있는 가시적(可視的) 활동이 긴요한 것이다. 런던의 「하이드.파크」가 두 연설을 묵은 역사를 가진 것이다. 어느 공산당이 굉장한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바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가톨릭측 연설자가 전_ 벌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가 저명한 가톨릭 문필가란 말을 뒤에 들었을 때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가톨릭 지성인이 거리에 나선(行動)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우리네 가톨릭 지성인은 대학이나 문단 및 그밖의 참으로 좋은 환경을 향유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다만 일정한 「프로그램」이 없고 그것을 뒷받침할 뒤가 아직도 희미한데 대단한 결함이 있는 것이다.
새날과 더불어 이런 일들을 가다듬고 의욕을 가지도록 하자. 우리에게 관형(冠形)되는 후진이란 말이 못마땅할진대, 조속히 무사려(無思慮)·무비판·무계획한 고식적 관념을 떨어버려야 한다.
새해가 묵은해보다 더 평탄한 안일과 무사와 태평을 더 봊아해줄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오직 새해에 바라는 더 큰 포부와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필경은 우리의 몸을 움직여 못내 채우던 약속을 달성시켜 주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