會見記(회견기)
國際的(국제적) 地位(지위)를 確保(확보)한 韓國(한국)
本敎區(본교구) 昇格(승격) 큰 慶事(경사)
우리敎會史(교회사) 1592年(년) 시작
발행일1962-06-17 [제331호, 3면]
교황 요안 23세 성하께서는 신약의 시작날인 성모영보첨례를 -3월 25일- 한국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지 3백70년만에, 자치(自治)교구로 승격시킨다고 성청에서 역사적인 발표를 하셨다. 남북한 3개 대주교구, 11개 본교구로 다스려질 한국교회는 역사적인 지점에 노였다. 6백명의 성직자 아래 50만이 넘는 우리 가톨릭들은 새 의욕과 사명을 지니고 29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3천만 겨레 앞에 『동포들을 천주에게로 인도할 것』을 엄숙히 선언할 것이다. 가톨릭시보는 이 역사적인 계끼를 더욱 성실히 명심하려 직접 성청을 매일 내왕하였고 이번 대주교 「빨리움」과 주교임명장 사본을 성청에서 우리나라로 운반한 디오니시오 백(白南翼) 신부에게 한국교계설정이 결정된 날의 로마동향을 들었다.
全世界(전세계) 알려진 韓國敎會(한국교회)
【문1】 한국교계설정 소식을 처음 듣던날의 그곳 광경은 어떠했읍니까?
【답】 한마디로 감곔량했읍니다. 이날이 성모영보첨례요 감열 대천신 첨례였었으니 그날 소생은 포교성성부차관 빼꼬라이오 몬시뇰의 안내로 포교성성장관 아가지아니안 추기경께 인도되어 이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감격한 나머지 오직 『감사합니다』란 인사밖에 들리 수가 없었읍니다. 그랫더니 「아」 추기경께서 『내게 감사할 것이 아니라 교황 성부께 감사드리라』고 겸손하셨읍니다.
그날 정오가 되자 로마시내 각 통신사는 이 희소식을 전세계로 전했고 14시30분 바티깐방송은 26개국어로 세계만방에 보도했읍니다. 또 이날 16시에 발간된 성청지 『옷세르바또레 로마노』도 제1면과 2면에 전면을 이 소식으로 채웠고 지난 15년간 한국담당인 빼꼬라이오 포교성성차관님의 장문의 한국교회사를 연재했읍니다.
그런데 성청은 교계설정을 결정할 때 서독 「본」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현 가톨릭대학 최(崔奭佑) 신부님의 박사학위논문 한국교회사를 참작했고 최신부의 논문대로 한국교회 첫출발이 1784년이 아니고 1592년임을 인정 발표한 것입니다.
아 卿 來翰 視察코 自治力 確認
【門】 언제부터 이 사실이 있을 것을 알고계셨으며 누구에 의해 추진되었읍니까?
【답】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1950년에 한국평신도들이 비오 12세께 청원서를 낸 것은 기업합니다. 6·25는 아마 이 결정을 연장시키는 사건이었겠읍니다. 그러나 동란 후 비약적인 발전상은 교계설정을 기대하는데 충분한 것임을 누구나 의심치 않았읍니다.
그렇다고 한국교회가 직접 이것을 신청할 수 없는 것이고 해서 로마에 있는 성직자들이 수시로 포교성성관계 어른들께 원의를 표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수년간 노대주교 원주교 구주교 서대주교 한주교현대주교 그리고 최주교님들이 로마방문때 남긴 인상과 포부 태도 등이 재촉한 것은 의심 없읍니다. 소생도 「아」 추기경께 거년 국방문시 이를 품달했고 추기경께서도 한국시찰목적이던 자치교구로의 승격가능성을 그때 확인한 것으로 믿습니다.
한편 서대주교님이 1960년 구라파서 귀국직전 김수환 신부를 대동하고 성청에서 빼꼬라이온 몬시뇰께 한국자치교구에 대해 말씀했읍니다. 그때 몬시뇰께서 이미 준비중이라고 하셨고 극동에서 한국교회의 지위를 인정한다고 했읍니다. 몬시뇰은 그때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슬퍼했읍니다.
그러나 그해 12월 8일 월남(越南), 작년에는 인도네시아가 각각 자치교구로 승격되어 이번 공의회 전후에 우리나라에도 이런 영광이 있을 것을 기대했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주한 교황사절 쥬삐 대주교님과 현사절대리 무튼 몬시뇰 힘이 결정적이었겠지요.
各界祝賀에 어리둥절 했었다
【문3】 포교성성장관께서 우리게 하신 말씀은?
【답】 대단히 기뻐하시면서 『의당히 이런 역사적 희소식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음을 확신한다.』고 하시고 『교황 성부와 한국의 대주교 주교 신부님 수도자들 평신도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하셨읍니다. 이날 소생과 로마의 우리 전 신자들은 한국교회의 뜻을 바들어 감사전문을 교황 성부와 「아」 장관께 드렸더니 곧 성하로부터 자애에 넘치는 답전을 주셨읍니다. 주와간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저희들은 그날 각계각층으로부터 인사받기에 바빴읍니다. 저희들은 전례에 따라 우리 유학인들이 성부께 우리말로 된 감사문을 드리려 준비중입니다.
아직은 布敎聖省 所屬
【문4】 우리 교회처럼 감목구에서 본교구가 되면 성청 교구 성성에 속하게 된다는데 우리 교회가 계속 포교성성에 속하는 의의는 무엇이며 다른 나라도 그런 곳이 있읍니까?
【답】 교회법상으로는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으니 계속 포교성성에 머물읍니다. 일본 월남 및 인도네시아가 그렇습니다. 요는 성청이 한국교회가 하루속히 자립할 것을 희망하여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한국교회의 자립을 인정한 것으로 봅니다.
【문5】 「빨리움」 운반의 임무를 맡게된 동기를 말씀해주십시요.
【답】 본인이 그간 한국주교님의 대표사무를 그곳서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6】 주교 임명장은 어떤 것입니까?
【답】 임명장 원본은 한장의 양피지에다 「뻬르가메나」라는 먹잉크로 쓴 것인데 이것은 포교성성에서 보관하고 본인이 교황사절관에 전한 것은 동사본 13매입니다.
拉致된 共産主義는 平壤敎區長
【문7】 성하께서 교계설정때 북한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시하셨다는데?
【답】 네 그랬읍니다. 박해 아래 있는 그곳에 깊은 동정을 표시했읍니다. 특히 6·25때 행방불명이 된 평양교구장 홍주교님을 이번 초대본교구장으로 임명하시고 대리로 캐롤 (安) 몬시뇰을 임명하신 것과 왜관의 이 몬시뇰을 대리로 한 것은 함흥과 평양교구 출신 성직자 신자를 크게 위로하신 것으로 보겠읍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동 조치는 한국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955년 쏘련 강제포로수용소서 석방된 한 서독사람이 동 수용소에서 한국주교님 한분을 보았다고 합니다. 로마에서는 이분을 홍주교님으로 추측합니다.
公議會 消息 時報에 보내겠다
【문8】 공의회가 열리면 『가톨릭시보』를 위해 소식을 주시겠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해주시겠읍니까!
【답】 다른 신부들과 힘을 모아 자세한 소식 특히 한국과 관련된 것은 항공편 혹은 전문으로 보내드리고 사진도 많이 보내겠읍니다. 기대해주십시요
【문9】 감사합니다. 그외에 하실 말씀은? 이나라 일반이 교계설정에서 감목구가 본교구로 승격한 것보다 대주교 세분이 승격을 중대시 하는데 물론 대주교 승격도 정말 중대하나 남북 11개 감목구가 본교구로 승격한 것이 더욱 역사적인 사실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귀 『시보』의 여러 중대하고 신속한 보도는 놀랐읍니다. 예컨데 로마서 있은 일을 그곳의 저희들도 미처 모르는 것을 『시보』를 보고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良心을 回復한 우리 革命
【문10】 혁명 후 사람들의 재건 의욕 및 양심의 회복에 대한 자발적인 현저한 노력에 대한 느낌은?
【답】 짧은 기간 내에 과감하게 여러가지 난문제를 혁명정부가 이룩해온 과업에 대하여 마음 든든히 여깁니다 그러나 혁명과업의 완수는 최고회의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국민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하겠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치교구로 승격된 한국교회의 번영은 주교 신부님들에게만 부과되는 책임이 아니라 모든 교우 각자가 나자신부터 착실한 교우가 되도록 노력하고 아울러 여러교우들이 혐조정신에 의거하여 나가는데 있다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