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와 思想界(사상계)
現代人(현대인)은 무엇을 要求(요구)하나
(承前(승전)) 公議會(공의회) 前後(전후)의 人類思想狀況(인류사상상황)
발행일1962-06-17 [제331호, 4면]
技術의 體驗
오늘 인류가 서로 교환하는 정신적 통일언어(言語)란 것은 기술문명, 기술문화라고 할 수 있음을 앞서 말했다. 그 통일 현상(現象)만을 주시해왔는데 더욱 세밀히 파들어가 보자.
도대체 이 문명의 내부구조(內部構造)는 어떻게 된 것인가.
특히 인간에 대해 어떻게 작용하는가 물론 광대한 문제를 좁은 지면에 다 말하지 못한다. 현대인의 특수한 종교적 견지에서 중요한 것만을 암시(暗示)한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어느문화에 있어서도 인간은 자연과 긴밀히 직접 연결되었었다. 자기직업 분야에 있어서도 인간은 자연(自然) 그것과 접촉하고 있었다. 헌데 기술은 사태(事態)를 일변시켰다. 기술화(技術化)는 인간이 직접 자연과 접속 못하게 하고 기술이란 도구(道具)를 매개(媒介)로 자연과 교섭케 하였다. 비근한 예로서 인간은 이미 샘(井)물을 긷지 않는다. 수도관으로 인공적으로 잘 거른(濾過)물을 가져오게 한다. 일상생활이 다 이렇다. 인간은 벌써 자연과 접촉할 장소를 잃고 그보다는 제 자신(自身)과의 접촉만 하고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인간은 신(神)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그 위르 덮(覆)는 인간의 일(WORK)과 만나고 있다.
이게 정신적 입장의 전체를 결정하는 반작용을 일으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인류사상 자연과의 접촉은 항상 종교적 체험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의 하나엿다. 성서에 의하면 대저 그의 볼 수 없는 본체(本體) - 곧 그 영원하신 전능과 천주성도 세상 배포이래 그 창조된 것으로 말미암아 지성으로 인하여 이미 알려진(로마 1의20) 것이었다.
자연에의 통로가 막히고 따라서 종교존재(存在)의 원천을 끊(斷)어 놓았다. 근대 무신론은 최초 노동자 등 기술환경에 퍼지고 드 당시 초기 자본주의의 무정의(無定義) 등 별별 이유가 있었겠지만 앞서 말한 그러한 근거가 있음이 분명하다.
허나 기술을 이단(異端) 취급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류사의 어떤 상황(狀況)에서도 그 안에 특수한 가능성이 있으면 이제 위험과 오늘 위험이 다른 것이다. 자연(自然)이 가진 종교력에도 위험이 스며져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류의 원죄사(原罪史)에 있어서 대개 그 능력은 창조주를 직각 인증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神)의 작업(作業)인 자연을 우상시(偶像視) 하게 하였다. 유일신(唯一神) 대신 잡신을 섬기게 된 것이다. (로마 1의 21-26). 오늘날 인간은 자연종교 대신 기술종교 즉 인간 자신을 위한 숭배로 표현되어 인류의 자기숭배(自己崇拜)는 내적필연성(內的必然性)을 가지고 자연 숭배와 대치(代置)하기에 도달했다.
신(神)을 앗아가버리고 세속화(世俗化)된 무대(舞臺)에는 인간만이 남았다. 즉 이 기술적 진보의 일부 은인에 대해서는 일종의 종교적 숭배를 느꼈다. 이렇게 종교에 대한 견지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이렇게 변화된 세계에 종교의 영원한 권리를 새로 해석해주고 제방법으로 이해(理解)시켜야 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科學過信
기술의 승리에서 오는 뚜렷한 겨과는 대중의 과학과신이다. 10년전에 절대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하게 되자 사람들은 무엇이건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과학만능을 신봉하고 가장 심각한 인간적 고뇌도 과학이면 해결될 줄 여긴다. 사회문리학(社會文理學), 즉 인간적 현상(現象)의 과학적인 취급은 다른 과학과 같을 것이라고 한 꽁뜨의 약속은 인간의 심저(心底)에 영향을 주었다.(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은 킨제보고(報告) 같은 처리방법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이런 처리방법은 통계상의 중치(中値)를 취해서 인간행위의 기준(規準)을 정하는 것으로서 윤리적 요청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精神醫)만을 믿고 있는 자는 심리학의 인식만을 기대하고 윤리적 투쟁 그로조차 오는 고뇌를 과학으로 다 해결해줄줄 믿고 있다. 과학적 설명은 인간의 기능장해를 그후는 죄와 벌으 압박관념 없이 조정유지(調整維持)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한편 이점을 가지고 기술적 인간에 신앙의 뜻을 새로 이해시켜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알(知)려지지 않은」 카르존재(A.) 「위대한 심연(深淵)」 (아우구스티누스)이며 현대과학으로 그 어떤 것을 해명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모든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등 다른 학문에 있어서 항상 불가해(不可解)를 남겨두고 있다.
그렇게 남겨질 것이야말로 그 근본에 있어 결정적인 것이요 인간적인 것이다. 사랑은 모든 타산(打算)을 넘어선 큰 기적이요 죄는 어떠한 통계로도 저울질 하지 못하는 가능성이다. 인간의 마음 오저(奧底)에는 무한을 부르는 구하는 소리가 있으며 무엇으로도 메우지 못하는 고독감이 있다. 무한(無限)을 구해마지 않는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무한(無限)뿐이다.
SOLO DIOS BASTA(神만으로 足하다) 이를 현대인에 의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만일 그가 신(神)으로조차 말해주는 자연(自然)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 마음이 신을 부르짖는 자신(自身)만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기술시대에 처한 그 자세(姿勢)를 바꾸어 가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지나(過)가는 (去) 것들을 허용함으로 영원한 것을 더욱 명백히 보여줄 것을 현대인은 바라고 있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세계에 의해서 극복되지 않고 그 신앙이 바로 세계를 극복할 힘에 차(滿)있는 것이다. (요왕 1서 5의4)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