再認識(재인식) 해야 할 어린이 - 食卓(식탁)에서부터 厚待(후대)하자
발행일1963-01-13 [제358호, 4면]
부모를 위하여 식탁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란 귀찮은 일이다. 차라리 아이들이 따로 먹으면 부모를 위하여 편하다. 그러나 부모들과 같이 식사할 때 성스러운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있어 자기 부모와 같은 식탁에 있다는 것이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식탁을 추억하지 아니하는가. 그것은 평화와 기쁨을 주었던 순간처럼 우리에게 나타난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거기 계셨다고 자랑삼아 말하지 아니하는가. 우리가 음식을 차려놓고 죽은 부모에게 제사를 올릴 때 부모님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이렇게 음식을 나누면서 즐길 것을 하는 심정이 아닌가. 아니 예수께서도 천국을 가정의 잔치에 비하지 아니하셨는가.
우리는 쌀을 주로 먹는다. 우리는 그것을 중히 여긴다. 쌀 가지고 장난하지 아니한다. 그것을 내던지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것을 중히 여긴다. 농부들의 땀의 결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모든 음식보다 더 중히 여기는 이유가 따로 있다. 우리는 신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하고 기구한다. 쌀은 인간 수고의 결정만이 아니고 그것은 천주의 선물이다. 어쨌든 아이들은 어른들의 태도를 보고 거기 성성을 발견한다.
그 외에 아버지가 「반전 축문」을 염할 때 음식은 더욱 성스러운 것이 된다. 아직도 순직한 공소 교우들은 신부가 강복한 밥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믿고 있다.
식탁에는 각자 제자리가 있다. 어머니가 각자에게 제 몫을 준다. 그러나 거기 불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머니가 주는 것을 잔소리 말고 받아야 한다. 여기 두 가지를 배워야 한다.
▲하나는 식욕의 만족을 희생할 줄 아는 덕을 훈련한다. 언제나 제일 맛있는 고기 덩어리가 제게 안오고 자기가 먹고싶은 것이 제게 오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사랑의 덕이다. 즉 남에게 좋은 몫이 가기 위하여 이러저러한 음식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을 초대할 때는 큰 가정 축일 외에는 아이들이 식탁에 잘 불리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오늘은 축일이다』 할 때 아이들은 행복을 느낀다. 이 축일은 예수께서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이해시키는데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처녀인 사촌누나와 아내를 여인 삼촌이나 벽을 바르기 위해 혹은 자봉침을 고치기 위하여 친구를 초대한 날 아이들이 가정식사를 같이 나눌 때가 있다. 아이들은 이 때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정의 표가 되는가를 발견한다.
어릴 때 아이들이 어머니를 도와주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들은 식탁을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도울 수 있다. 이런 일은 장려할 만한 것이다. 그들이 어머니께 협력함으로써 모든 이에게 기쁨을 자아내게 한다.
예수께서 가끔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하셨다. 「가나」에서 베드루 집에서 마테오 집에서 말타와 마리아집에서 자케오의 집에서 베드루 종도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부활하신 후에도 당신 제자들과 먹고 마셨다. 그는 들에서 떡을 많게하는 기적까지 행하셨다. 비유에서 천국을 잔치에 비하셨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러한 복음의 광경을 이야기 해줄 때 그들을 위하여 가정의 식사가 성성을 발견하는 때가 될 것이라는 것이 그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들과 음식을 같이 했을 때 그의 참석이 우정의 표가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탁에 앉으면 그날 아침 아이들과 마음 상한 것을 잊어버리고 아이들도 아버지 어머니가 용서해 주셨다고 믿는다. 그들이 누나나 형과 싸왔다면 식사 때 그것을 자연히 잊어버리게 된다. 식사 때는 화목해야 한다. 이렇게 식사는 용서하는 덕을 발견케 해준다.
우리가 말한 이 모 든 것은 성체성사께 대한 먼 예비를 시켜 준다. 우리가 사용한 말들이 그것을 증거한다. 『행보하다 같이 즐기다 나누다 화목하다 초대하다 등등』 이것들이 다음에 성체께 대하여 말할 때 사용될 말들이다. 예수께서 성체 성사를 세우시고자 삼년을 준비시키셨다. 우리의 가정 식사는 아이들의 소년시절을 통하여 그들을 첫영성체 준비로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