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9) 夜暗(야암) ①
발행일1963-01-13 [제358호, 4면]
수련이는 곧 명동고개로 달려갔다. 언덕마루에 우뚜솟은 여덟층집 집이라기보다는 마치 유리궁전(宮殿)이다. 유리창만으로 이루어진 집이다. 수련이는 병원 앞에 이르러 명동 큰 성당을 우러러 보았다. 그 아래로 성모님을 모신 동굴 앞을 지났다.
겨우 신부님의 시야에서 벗어났는가 했더니 또 다시 성당 안으로 다가들어서게 된 자기의 걷는 발길이 이상스러울 지경이다.
(어쩌다가 온종일 천주교 테두리 속에서 뺑뺑 돌고 있을까)
수련이는 성모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이런 생각을 했다.
『육층으로 가려는데요…』
수련이는 층계 앞에 앉아있는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 승강기를 타고 육층으로 간다고 하십시요』
안내원은 무표정했다. 아마 온종일 면회하러 오는 외래객과 입씨름하기에 지친 모양이다. 무슨 말대답하는 기계같았다.
『아마 말대답 한 번에 얼마씩 「팁」을 받는다면 좀 더 낯빛이 부드러울거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팁」을 바라고 사는 수련이의 직업의식이다. 그리고 나서는 곧 남령 「빠」 아가씨들이 손님의 주머니를 노리고 안 나오는 웃음과 지나친 아첨을 퍼붓는 얌체빠진 태도가 다시금 천착스러워졌다. 당치도 않은데다가 비교해봤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저게 정당한 자세일지도 몰라.』
승강기쪽으로 가면서 수련이는 버티고 앉은 안내원의 태도를 긍정하기도 했다. 수련이는 마침 면회를 허락하는 시간 중에 왔응니 괜찮았으나 면회시간이 아닐 때 환자를 찾아온 친지들은 가끔 층계 앞에서 안내원과 옥신각신 말썽을 일으켰다. 큰 병원이면 어디나 다 면회는 제한돼있건만 면회하러 온 친지들은 자기 혼자만 답답한듯이 야단들이다.
수련이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곧 승강기를 탔다. 6층에서 내려 진영의 병실은 곧 찾았다. 순옥이가 진영이의 머리밭에 오드만이 앉아 있었다.
『수련아 왜 인제 와』
순옥이는 수련이를 꾸짓듯 눈을 흘겼다.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되다니. 같이 놀러 갔다가 진영이면 남겨두고 어디로 도망쳤대며』
수련이는 순옥이의 쫑알대는 소리는 아랑곳 않고 곧 진영이의 머리맡으로 닫가섰다. 진영이는 눈을 감고 있다.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수련이에게 노여움이 있어서 일부러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영아 어떻게 된 일이야』
수련이는 진영이 귀에다 대고 나직이 말했다.
진영이는 대답은 하지 않고 돌아눕는다. 수련이는 픽 웃고 순옥이 옆에 앉았다.
『글세 다 죽었다가 겨우 살아났어』
순옥이가 소근거렸다.
『도대체 어디를 다쳤니…』
『말도 말어…』
『어서 말 좀 해』
『독약을 마셨지 뭐야』
『뭐- 독약?』
『글세 그 홍창식이라는 이가 술에다 약을 타서 자기도 먹구 진영이두 먹였대!』
『그래 홍전무는 어떻게 됐어』
『그인, 그 이대루 다른 병원에 입원했대』
『홍전무도 미쳤지, 그게 웬일이야』
『진영인 이제야 겨우 의식이 돌았는데 줄창 너만 찾아… 그러더니 정작 네가 오니까 돌아누지 않아』
『진영이두 어제 저녁에 술이 좀 과했거던… 홍전무 술을 당해.』
『홍전무는 너를 좋아하는 줄 알았떠니 어떻게 진영이하고 약을 마셨는지 알숭달숭야.』
『그건 나두 모르지…. 어쨌든 진영이가 입을 열어야 알 일인데 저렇게 외면을 하니까…… 마음이 좀 풀리기를 기다려서 물어봐야지.』
『신문사에서들 다녀갔지.』
『뭐… 신문사에선 어떻게 알고』
『인천서 소문이 퍼졌나봐.』
『또 내 이름이나 나지 않을까.』
수련이는 가슴이 덜컥했다. 바로 이 때다.
『이 기집애야. 네 까짓게 무슨 이름이 높다고 신문에 날까봐 걱정이냐.』
진영의 분개한 음성이 들렸다.
『진영아 어떻게 된 일이야 말 좀 해 봐』
수련이는 진영이의 얼굴 가까이 다가앉았다.
『넌 사람이 아냐. 의리 없는 년야! 글세 나만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치는 법도 있어.』
『그건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이렇게 될 줄이야 알았어.』
『홍전문 죽어 싸. 왜 나까지 끌고 죽으려는 거야』
『미쳤지. 그게 웬일이야』
『사업에 실패했다는 거야. 모두가 계집 때문이라는 거야. 계집에게 속고 뺐기고 남은건 부채와 절망 뿐이래. 그래서 송도에서 죽으려구 작정을 하고 온거래』
『우리가 깜박 속았지 뭐냐』
『실은 너하고 죽으려 했던거래. 네가 그만 도망쳐 버리니까 나를 네 대신 지옥까지 끌고 가려고』
『어쨌든 미안해. 그러나 내가 책임질 문제는 아냐』
『그러니까 내가 너를 유인해다가 홍전무에게 대준거라 그말이지』
『……』
수련이는 그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병석에 누워 있는 진영이에게 너무하는 것 같아서이다.
『어쨌든 어서 몸조심이나 잘해…. 그개 선결문제야』
진영이는 그냥 돌아누워 울었다. 무엇이 슬픈지 느껴가며 울었다.
『면회시간이 지났읍니다. 면회 오신 분은 곧 돌아가 주십시요』
「스피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고 수련이는 슬쩍 순옥이에게 눈짓을 했다.
(어서 빠져나가자)는 신호이다.
『진영아 내일 면회시간에 또 올께』
순옥이가 작별인사를 했다.
『울 엄마한텐 알리지마. 와서 묻거든 부산까지 볼 일 보러 갔다고 해둬』
진영이는 여전히 외면한 채 부탁을 했다.
『염려마. 내 너 하라는대로 할께』
순옥이는 진영이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살살 달랬다.
병원에서 빠져나와 명동거리로 들어섰다. 「남령」「빠」는 바로 명동 뒷골목에 있다.
『수련아 아직 이르니 우리 차나 한 잔 마시고 이야기 좀 하자』
순옥이는 벌써 찻집문을 밀고 들어섰다.
수련이는 그냥 따라 들어갔다. 순옥이는 광나루에 병든 남편과 어린 딸이 있다. 순옥이는 병든 남편의 약값과 딸 은숙이의 교육비를 얻기 위해서 「빠」에 나온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침울하다. 말이 많지 않고 항상 세상을 흘겨보는 버릇이 있다.
순옥이의 눈에는 진영이고 수련이고 모두가 「빠」에까지 전락하지 않아도 능히 살 길이 있어 보일는지 모른다.
『여북 기가 맥혀야 술집으로 떨어졌을라구. 너희들은 다 바람쟁이 난봉들이야. 나와는 달라.』
손님이 억지로 퍼먹이는 술에 취하면 순옥이는 늘 이런 소리를 했다. 순옥이는 4·19 전만해도 그 남편되는 한응수가 젊은 공무원으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순옥이는 그 때 다방 「레지」로 있었다. 늘 차를 마시러 오는 손님 중에서 한응수가 눈에 띄었다. 젊은 그들은 얼마 안 가서 셋방을 얻고 동서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은 순옥이가 응수의 애기를 수태함으로써 서둘러진 일이다.
응수는 이북에서 단신으로 넘어와 고학을 해서 입신한 청년이다. 친척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순옥이는 비록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으나 그래도 어엿한 독신자와 같이 사는 것이 사뭇 대견했다.
그러던 것이 은숙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4·19가 터지고 응수는 그 때 관청에서 베_다가 소란통에 가슴을 다쳐 그 때부터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했다.
게다가 부정공무원 숙청이라는 명부에 이름이 올라 실직을 했다.
남편이 직업을 잃고 병들어 눕게 되니 약값이고 쌀값이고 순옥이가 벌어들이지 않고는 세 식구가 살아갈 길이 없이된 것이다. 그래서 순옥이 역시 진영이의 주선으로 술파는 자리에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순옥이와 수련이는 진영이를 대하면 선배 대접을 하나, 단 둘이서 만나면 진영이를 경멸하는 일이 많다.
(그 계집애만 아니더면 굶어죽어도 이런데는 나오지 않았으리라)
원망스러운 때가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진영이는 언제나 자기가 끌어들인 동무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애 너 그 손님 전 엉터리다. 괜히 속지 말고 내 말만 들어』
만일에 진영이가 모르는 사이에 손님에게 「팁」이라도 좀 넉넉히 받으면 의례 껀 한 마디 했다.
『순옥이와 수련이는 내 허가 없이는 손목 한 번 못 잡읍니다. 괜히 큰일나요.』
술이 얼근히 취하면 진영이는 손님을 노려보고 이런 소리를 하기가 일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