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洲隨想(구주수상)] ⑩ 잃어버린 학원
로베르 精神(정신) 잃은 「소르본느」
이제야 復古運動(복고운동)하는 學生(학생)들
발행일1962-06-24 [제332호, 3면]
「빠리」 시내의 허다한 대로중에서도 「셍 미셀」대가(大街)라고 하면 학생들의 거리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저번에 했다. 이 거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이 뒤끓어 마치 만국학생대회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거리에 유명한 「소르본느」가 있기 때문이다.
「라 소르본느」라고 하면 「빠리」대학의 문리과대학(文理科大學)의 이름이다 또 여기에는 「빠리」대학교의 본부와 도서관 등, 그 「센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소르본」는 대학이란 말이 없어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253년이라고 하면 7백년전 일이니 아득한 옛날이야기다. 「빠리」에 로베르라는 본당신부님이 계셨는데 그 출신지 즉 고향동리 이름이 「소르본」이었다. 「레에텔」 가까이 있는 조그마한 촌락이다. 중세기에는 본명만으로는 사람을 구별하기 어려우니 「소르본」에서 온 「로베르」라는 뜻으로 「로베르 드 소르본」 신부라고 그를 불렀다.
로베르 신부는 젊을 때부터 가난한 학생들을 잘 돌보기로 유명했고 또 그는 루이성왕의 고해신부로서도 고명(高名)했다. 이 신부를 찾아 바랑을 메고 「알프스」의 준령을 넘어 오는 젊은 학도들이 있었다고 하니 로베르 신부의 이름은 그 당시에도 벌써 사해에 알려졌던 모양이다. 학식으로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그 성덕을 추앙하여 학생들이 찾아들어 지도를 구한 것이었다.
「로베르」 신부는 지금으로부터 7백년 전인 1253년 왕의 후원을 얻어 가난한 학생 16명을 데리고 학교를 세워 그들과 침식을 같이하며 신학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 학교가 중세기를 통한 신학도의 본산이오 또한 「빠리」대학의 본부가 된 것이며 로베르 신부의 이름을 계승하여 오늘날의 「라 소르본느」가 된 것이다.
7백년이 지난 오늘도 「소르본느」는 세계 젊은학도들의 동경하는 곳으로 각국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든다.
그러나 로베르의 대학창립의 정신은 간 곳 없고 천주를 알아 공경할 「상지의 좌」(上知의 坐)를 찾을 길을 잃고 학생들은 「소르본느」가 왜 유명한지 그 참뜻을 모른다. 국립 「빠리」대학은 가토리시즘을 학원에서 몰아내었다. 추기경 리셜리어가 이 대학을 재건하고 1624년부터 42년까지 대학과 성당을 건설하여 로베르 신부의 정신을 부흥시켜 놓은 그 대학성당 정면에는 실증주의철학자 오규스트 꽁트의 동상을 세워놓고 성당은 주인 없는 빈집을 만들어 놓았다.
성당 건물 안에 들어서면 컴컴하고 냉냉하다. 옷을 벗은 제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바른 편에 리셜리어의 묘지가 백색대리석으로 덮인 채 남아있고 이 고위 성직자의 영면을 기억하는 동상이 석관위에 조각되어 있다. 그 발을 부둥켜 안고 지선학의 신이 통곡하고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텅빈 폐허다. 혼이 나간 대학의 「셍볼」로 「소르본느」의 성당은 다시 혼을 불어넣어 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교회는 잃은 것이 많다.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 일이 이 성당 앞마당에서 지금 한창 일어나고 있다. 「리셜리어」운동이 곧 그것이다. 「소르본느」를 중심으로 「빠리」대학생들간에 패연히 불어가는 「가톨릭」학생운동이다. 그들은 이 주인잃은 성당 앞에 그 본부를 두고 다시 말하면 「소르본느」 밖에서 다시 이 대학을 찾는 일이다.
학생들의 영혼을 찾고 대학의 정신을 바로 잡는 일이다. 이 어두은 성당 안에 다시 영원의 불이 켜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