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鍾仁(박종인)씨 慈愛園兒(자애원아) 35名(명)과 같이 入敎(입교)
8·15, 6·25가 버린 꼬마들을 이젠 예수아기께 맡겨
그들의 낡은 무릎을 꿇었을 때 고독한 영혼들은 거기 그들과 같이 헐벗고 가난한 모습으로 말구유의 짚 위에 누워 있는 작은 예수를 비로소 보았던 것이다.
1962년이 저물어가는, 왼세상이 그들이 아랑곳 없는 예수가 났다는 「크리머스」를 제머데로 흥청거리는 성탄의 밤에 세상에서 잃어버린 부모의 설음과 외로운 눈물을 싣고 먼먼 황야를 헤매던 그들은 비로소 그드르이 가난하고 평화의 주인인 어린 친구 앞에 고달픈 여정을 멈추었던 것이다.
예수는 불우한 자의 눈물을 씨어주시메 그들은 거기서 웃었다. 그들은 한 무리를 지어 이 신비한 밤에 어두움 속에 나타난 목동물과도 같이 나타난 57명의 고아들인 것이다.
그들 중 35명이 세를 받고 원죄의 사함을 받아 정결한 아들로 택함을 받았다.
대전시 신흥동 자애원은 지금부터 19년 전 1945년에 시작했다.
동원의 원장 박종인(朴鍾仁)씨는 해방을 맞이하여 잃었던 조국을 찾아 해외로부터 돌아오는 이재 동포들 속에 불의에 부모를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수다한 어린 고아들을 보았을 때 그의 남달리 뜨거운 인간애는 이를 지나칠 수 없어 따뜻한 안식처를 마련하여 준 것이 동원 설립의 시초가 되었다.
연이어 6·25 동난이 빚어낸 비극의 열매들, 무수한 전쟁고아를 박씨는 그의 품에 걷어들였고 자애롭고 그리 나전란의 무서운 격랑 속에서도 불의와 타협함이 없이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의 튼튼한 울이 되어 버틴지 17년, 그의 이러한 열정과 강직한 의지력은 실로 아는 이의 칭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역경 속에서 스스로 선의의 무거운 명애를 이끌었던 박씨는 그러나 그는 무엇인지 내적생활에 하나의 뚜렷한 계기와 사명의식을 자각하게 되고 그 무언가 이름 모를 결단을 스스로 요구받게 되었을 때 그는 그만을 의지하는 서러운 양들을 이끌어 다시 참다운 안식처로 인도한 것이다.
돌이켜 17년 전 해방 당시 대전 역전에 해외귀환동포 이재민 구호위원회가 조직되고 대전본당 주임 오요셉(吳基先) 신부님이 동회 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박원장도 같은 구호 위원으로 활약했고 그 후 1952년부터 61년까지 만 10년간 충남사회사업연합회 회장으로 오신부님이 계실 당시에 박원장 또한 부회장으로, 이 애로가 많은 사업을 같이 이끌어 동고동락하는 중에 이미 진리의 씨는 움텃고 가꾸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에도 이 박원장의 말을 빌리면 오신부님은 한마디의 직접적인 전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일이 없다고 하니 과연 말없는 그 진실한 표양으로 영혼을 이끌 수 있음을 무언 중에 표방한 산증거가 또 여기에 있지 않는가.
박원장이 시몬을 주보로 모시고 영세받기를 최후로 결정하기는 4년 전부터였고 약 7개월 전부터는 대전본당으로부터 교리 지도자를 일주일 2회씩 초청하여 전가족이 모여앉아 2시간씩 교리를 배워 지난 성탄에 35명이 영세하고 나머지 22명도 부활축일에는 전원이 영세받게 되리라 한다.
그런데 이번 영세자 중에는 3대를 공주계룡갑사 주지를 지낸 (현제 고아) 후예 방지거 홍(洪成휘)군이 세를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