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와 思想界(사상계)
神學(신학)의 모티브=聖母信心(성모신심)과 典禮(전례)
바른 價値(가치)를 提示(제시)하고자
발행일1962-06-24 [제332호, 4면]
■ 이데올로기
현대사상계를 말할 때 맑시즘 실존주의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하는 큰 것들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만일 그 실제의 깊이에 있어서 그것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근본 상황(狀況)을 살펴야 한다. 여러 꼴(形態)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 현상(現象)은 신앙 대신 이데올로기를 놓고(代置) 신(神)이 없는 세속화(世俗化)된 세계를 그려두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에게 신적 존재(存在)에의 신앙대신 그것만으로 포괄적(包括的)인 세계해명(世界解明)과 생(生)의 의의(意義)를 알려주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그 때문에 신(神)에의 신앙을 차지하려는 노력조차 없이 스스로 무종교(無宗敎)의 종교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 그 세계의 필연적(必然的) 소산이다. 이데올로기는 종교는 아니다. 그러나 종교의 행세를 하려든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본질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흔히 대용(代用) 종교라고 한다. 이것으로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건드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자연과학 기술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이 그 자신에 쫓기(追)고 있는 거기서 생겨진 그 어떤 새것이다 .이런 상황(狀況)에서 인간은 종교에의 통로를 얻지 못한다. 인간은 종교가 준(與) 바 즉 정신성 및 그 의의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 없이 결코 생활하지 못한다.
오늘 맑시즘과 신(新) 자유주의는 쌍벽(雙璧)을 싸올리고 있다. 이 두가지를 알아두어야 한다. 우리가 막연히 서(西)라고 이름지어두고 있는 것이 있다. 가톨릭이 주도(主導)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태리 스페인 프랑스, 독일 및 미국 등에서의 큰 감화(感化)를 주는 우리의 그것과 이질적(異質的)이면서 그러면서 귀중한 그것(西)인데 그 둘레(周圍)를 짜고있는 바로 그것을 신(新) 자유주의라고 하고 싶다. 그간에 있어 각종 혼합형식(混合形式)이 있어 그것은 맑스주의의 요소와 거기 얼마간의 자유주의를 섞은 소위 민주사회주의란 것도 있다. 좀 더 거리를 두고 있는 철학에서 나온 이데올로기화(化)한 실존주의도 있다.
이것은 근본은 자유주의지만, 그 허무적경향(虛無的傾向)에서 맑스주의에 매우 강하게 끌리고 있음을 본다. 국가주의적 신화(神話)는 구라파에서는 팟시즘의 붕괴와 함께 멀어졌다. 구(舊) 식민지 국가에서의 발흥(勃興)은 그 모습을 파악할 수 없는 형편에 있다.
이같은 형편에서 또한가지 주의할 일이 있다. 본래 이데올로기의 지배권(圈) 즉 구라파 · 미국 · 러시아에서는 일반 대중간에 비(非) 이데올로기화(化)란 것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그 세계관적(世界觀的) 성격을 다 잃고 발족시의 감격같은 것도 쇠퇴했다. 지상낙원(樂園)은 단념한지 오래고 대단히 실용적인 것이 되었다. 그저 손아귀에 든 생활수준에 안좌(安坐)해있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그렇단 말이다. 번영은 존재의 의의를 추궁하는 인간을 안일(安逸)이란 배후에 한동안은 머물게 할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거기 머물게 할 수는 없다. 그때문에 현재 활동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일지라도 새 정세(情勢)가 그 안일은 언제 깨우쳐서 정면으로 맛서게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까지 말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박은 생략한다. 그런데 그들 이데올로기가 현대교회에 어떤 적극적인 과제를 주(負)고 있는가? 먼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답은 신앙(信仰)에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그 대답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항상 길을 잃고 헤메는 자이다.
그 연고는 고차(高次)의 것보다 저차(低次)의 제물에 유혹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할 일은 인간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러한 가치(價値)를 바른 위치(位置)에서 보여주는데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맑시즘을 희망의 이데올로기이라 한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희망과 그리스도교도의 희망적 신앙이 세속화된 지상(地上)의 약속과 뒤바꿔져 있고 그 안에는 아직도 신국(神國)은 인간의 국가와 바꿔치기 되었다. 실존주의는 여기 대하여 희망상실(希望喪失)의 철학을 주장한다.
모든 것에 다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무의미한 것을 행(行)하는 호연대담한 생활을 인정하고자 한다.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관용(寬容)의 이념, 타인의 정신적 자유의 존중 모든 정신의 정규(定規)에 항거하는 성실에 대한 단호한 의지, 이런 것들은 당연히 매력을 느낄 진심(眞心)의 가치인 것이다. 우리가 그 실현을 남에게만 맡겨도 좋은가?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교 없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밖에서는 얻을 수도 없음을 알려야 한다. 전체주의의 쓰라린 경험을 한 인간은 사소한 전체주의적 태도에도 대단히 민감하고 비판적이다. 이게 지나쳐서 인덱스(禁書目錄) 같은 교회의 인습형식(因襲形式) 같은 것에 전체주의를 느끼로 더 넓은 가토리시즘과는 대결하려 들지 않는다.
개인의 의견성의는 도무지 발휘될 수 없는 줄 생각는다. 그때문에 공의회에 대해서도 실제로 공동으로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문자 그대로 공의회(公議會)가 될까 의심한다. 이런 사실들은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그들은 구실만 찾으려고 한다.
오는 공의회는 무엇보다 실제적 견지에서의 개혁공의회라고 선포되었다. 인습형식을 재검토(再檢討) 하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많은 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는 사소한 것으로 여길 것도 있을지 모르나 실은 그 사소한 것이 곧 오늘의 인간이 아비집에 돌아오듯 교회를 찾게하여 거기서 희열(喜悅)과 안정을 얻게 해 줄 것이다.
■ 結論考
중요한 논점에 도달하면서 붓을 놓아야 한다. 지금까지 인류의 사상상황을 말했으나 그것은 교회밖이 것이요 교회 자신의 정신적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교회는 지금 더욱 성신의 입김(息)으로 생활하며 제1차 바티깐 공의회 당시에 예상도 못했으리만큼 많은 결실을 맺고 있다. 카리스마(=超自然恩惠, 譯者註)란 규칙적 질서를 넘어서 돌연 교회 안에 새생활을 약속하는 성신의 작용이다. 우리 세대는 2대 카리스마적 운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마리아운동과 전례운동이다. 이 두 위대한 운동의 증인은 곧 우리들인 것이다. 전례적 신심을 약간 부정확한 통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객관적=성사적이고 마리앙신심은 주관적=개인적인 것이다. 전례신심은 PER CHRISTUM AD PATREM,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이고 마리아신심은 PER MARIAM AD JESUM 마리아를 통해 예수께인 것이다.
만일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카리스마가 교회에 열릴 때 얼마나 많은 새 부(富)가 교회로 들어올 것인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교회 내의 두개의 정신적 조류는 우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켜 갈 것인가.
성모 마리아는 그 자체 고립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신 교회의 원형이요 상징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단지 신(神)과 대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와 「나」가 아니라 주성모를 중심으로 모든 성인과 통공(通功)하는 가운데 마리아 현의(玄義)가 더욱 생생한 상징이 되고 있음을. 따라서 성모님께서는 교회를 지시(指示)하고 전례에 있어서 기구하면서 모든 성인이 통고할 것을 지시힌다.
금후 수십년간은 이런 마리아 운동을 전례 운동에 집어넣어 신학적 모티브를 장만해 갈 것이다. 마리아운동은 따뜻한 마음, 열심과 감동 회개하고 보상하는 깊은 각오를 전례에 준다. 그와같이 전례는 거룩한 밝고 청명(淸明)한데 다시 그리스도교적 기도와 사고(思考)의 대법칙의 엄격성을 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나약한 상상력을 제어(制御)하여 우리의 사랑하는 마음을 옳은 자리(場所)에 들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있다. .
이 반세기간 로마 3백년 박해의 그것보다 더 많은 순교자를 내고 있다. 이때 우리는 한가히 천주께만 의탁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신앙의 빈곤과 교회의 피로(疲勞)만을 불만할 수 있겠는가. 순교자의 교회는 그안에 성신이 작용하고 고난과 불굴의 생명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생명의 증명을 그리고 그리스도는 단지 「어제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임을 어제, 오늘, 영원의 유일한 그리스도임을 진실로 증명(헤브레아 13의8)하는 그것이 오는 공의회의 중요과제인 줄 생각된다.
(抄譯 · 編輯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