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10) 夜暗(야암) ②
발행일1963-01-20 [제359호, 4면]
다방에 손님이 그득했다. 커피를 팔지 못하게 된 뒤 얼마동안 뜸하던 손님이 다시 몰려들게 된 것이다.
『이애 저리가』
순옥이는 제일 으슥한 자리로 앞서갔다. 고요한 음악이 한결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무슨 차를 마실가』
『이애 비싼건 그만 두어』
결국은 홍차로 낙착이 되었다. 수련이와 순옥이는 김이 오르는 홍차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마주보고 앉아있다. 제각기 자기의 입장에서 병석에 누워있는 진영이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모르겠어 정말. 진영이가 하는 일을 통 알 수가 없어』
『흐…흐… 누가 아니래. 어디서 어디까지가 정말인지 우리같은 머리 가지고는 알아낼 도리가 없는걸』
『요는 그 아이는 자기가 인물이 잘 나지 못해서 손님이 따르지를 않으니까 언제나 누구든지 업고 들어가는 거야』
『글세 우리를 자기의 영업 도구마냥 이용을 하려들지 않아』
『이번 일도 수련이 네가 그렇게 뿌리치고 달아날 줄은 모르고 홍전무에게 운동비 받아서 한목 쓰고 꾸며낸 연극일거야』
『그렇기로서니 홍씨는 하필이면 나를 끌고 같이 죽으려 할 건 뭐야』
『사내란 그저 그런 정도야. 실컷 돈 쓰고 놀러 다니다가 돈 떨어지고 징역갈 계제가 되면 돈 빨아먹은 애들은 다 꽁문이를 빼거든. 일이 그렇게 되면 화류계 여자는 훗두루 맡두루 모두 원망스러워져서 나종엔 이왕 죽을바엔 아무래도 하나 끌고 가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겠지.』
순옥이의 말에는 수긍할 점이 있었다.
수련이는 가벼운 몸서리를 쳤다. 까딱하다간 억울한 정사(情死)를 당할번 한 것이다.
송도에서 무심코 손에 쥐었던 묵주가 마치 자기를 죽을 고비에서 건져준 것 같기도 했다.
『그래 홍전무는 벌두 당하지 않나』
『아마 그냥 슬쩍… 경찰에는 알리지 않고 끝났나바』
『그건 천만 다행이지 사건이 벌어지면 나까지 불려갈 거 아냐』
『그렇지만 또 누가 알아.』
『이애 기분 나쁘다. 왜 그런소리는 해. 나는 남편과 자식이 있는 사람이야』
수련이는 으젓하게 한 마디 했다. 그러나 몹시 허전했다. 자식은 분명히 있으나 남편의 존재는 희미하다. 어디가서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이 묘연하다.
『세상 무슨 사람이 그래… 그렇게 좋다고 쫓아다니더니…』
수련이는 문득 자기를 버리고 자취를 감춘 박영진(朴永進)이를 회상했다. 몹시 원망스러운 사나이기도 하나 차마 잊을 수 없는 사나이기도 하다.
『수련아 너도 인제 그깟 애아버지 그만 기다리고 일찍암치 남편이나 얻어. 아까운 청춘 허무하게 보내겠어』
『난 뭐 그 이를 기다리려고 이러는건 아냐. 통 싫어? 다신 사나이와 친하지 못할 것만 같아』
『호…호… 그게 미련이라는 거야. 온 세상에 그런 남자를 기다리다니』
『우선 난 돈을 벌어 시골가서 어머니하고 오손도손 농사나 짓고 우리 미남이 공부나 시킬래』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어렵긴 뭐가 어려워. 모진 맘 먹고 술주정꾼에게 유혹만 당하지 않으면 쉽지』
『어디 두고 보자』
『두고 보래두』
『흥… 나는 뭐 너만큼 결심이 부족해서 이 꼴이 된 줄 알아… 우리 집은 숙이 아버지가 병들어 누운 지가 벌써 이년이야… 약값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남편의 약값을 벌기 위해 남편을 속이고 또 다른 사나이와 거짓이나마 사랑을 속삭여야 해』
『그럼 그게 열녀일까.』
『그것 나두 모르지. 그러나 이미 한 발 시궁창에 넣고 만 걸 어째.』
『아-이. 머릿살 아파. 자- 차나 마시고 가자.』
수련이는 순옥이의 서글픈 사정을 차마 더 들을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빠」에 나간 것을 뉘우쳐도 때는 늦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끝까지 견디어 보자는 결심을 한 것이다.
이날 밤 「남령, 빠」에는 문을 열며부터 진영이 이야기로 법석을 했다. 마담은 차가운 눈초리로 수련이를 노려보고 있다.
『미스김도 진영이와 같이 갔었다며…』
음성은 나지막했으나 칼을 품은 소리 같았다.
『전 잠시 같이 갔다가 먼저 왔어요.』
『그게 무슨 짓이야. 진영인 술만 취하면 형편 없는 줄 알잖아』
『제가 올 땐 취하지 않았어요』
『뭐구 뭐구 신문에나 나는 날이면 내 영업은 어떻게 되지. 「남령빠」는 무슨 죄로 서리를 맞느냐 말이야』
수련이는 왈칵 치밀었다. 수련이도 하나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판에 마치 공범같이 다루는데 비위가 상한 것이다.
『나중에 진영이가 퇴원하거든 물어보세요. 저도 진영이에게 속아서 갔었어요』
그래도 마담의 앞인지라 수련이는 성미를 죽이고 말았다. 마담은 그래도 몇 마디 더 하려는 기색이었으나, 손님이 밀고 드는 통에 이야기는 일단 중단되고 말았다.
『미스김! 저쪽 오번 손님이 좀 보재요』
사환 아이가 꾹 찔렀다. 수련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오번 테불을 주시했다. 전혀 아지 못하는 손님이다. 중년 신사였다.
『누굴까』
수련이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오번 「테불」로 갔다.
『수련아 손님이 좀 이상해. 조심해.』
순옥이가 날쌔게 귀띔을 했다.
『저 부르셨어요』
수련이는 어색한 질문을 했다. 손은 맥주잔을 든 채 수련이를 쏘아본다.
『저를 어떻게 아세요』
수련이는 재차 물었다.
『당신이 김수련씨요』
『네』
『게 좀 앉으시요』
『저는 통 뵈온 기억이 나질 않는데요』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피차간 초면이오 어서 앉아요』
손은 맥주잔을 한숨에 들이켰다. 수련이는 거의 직업적으로 맥주병을 들어 술을 따르려 했다. 그러나 손은 그 술을 받지 않았다.
『아니 나 술 그만 마시겠소. 한 잔 마셨더니 갈증이 꺼졌어요』
이 손은 맥주를 목마를 때 냉수같이 아니보다.
『어서 말 좀 하셔요』
수련이는 조급했다. 이 사나이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을 내놓았다.
『김 수련씨 계신 곳을 찾느라구 무진 애를 썼읍니다』
명함을 보니 역시 모른 사람이다. 주소도 직업도 적히지 않은 사람이다. 안명철 安明哲이라는 사나이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찾아왔는가. 공연히 마음이 설레었다.
『저 나는 한달포 전에 「홍콩」서 왔어요』
『그래요』
『저 혹시 박영진이이라고 아시ㅏ는지』
『박연진요?』
수련이는 가슴이 덜컥했다. 이 사나이가 분명 미남이 아버지의 소식을 가져온 게 분명하다.
『그 분은 제 남편입니다.』
수련이는 얼굴이 화끈했다. 박영진의 친구를 「빠」에서 만나다니 난처한 일이다.
『박군은 저와는 절친한 사이입니다』
『그래 지금 어디 계셔요』
『어쨌든 무고히 잘 있읍니다』
『그럼 역시 「홍콩」?』
『그건 아닙니다. 이야기가 좀 길겠는데 조용한 시간을 좀 주실 수 없을까요』
수련이는 즉시 일어섰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곧 같이 모시고 나가겠어요』
수련이는 곧 마담에게 달려들었다. 마담은 여전히 뾰로통하고 있다.
『저 잠시 외출 좀 해야겠어요』
『아-니 어디서 온 손님인데 집에서 술을 팔 것이지 외출은 다 뭐야』
『술손님이 아니야요. 얼른 다녀 들어올께요』
수련이는 마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명철이를 일으켰다.
『그럼 잠깐 나가실까요』
『영업시간인데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하도 갑갑해서 나오는 걸요』
『그럼 나갑시다』
안명철은 맥주를 한 잔밖에 안 마시고 천환짜리 두 장을 놓고 일어섰다.
『자… 나가십시다』
수련이가 안명철이와 막 「남령·빠」 문을 밀고 어둠이 깃든 거리로 나서려 할 때다.
『당신이 김수련이죠』
어깨를 툭치는 사나이가 있다. 바라도 보니 그것은 언젠가 한 번 봤던 경찰서 형사이다. 수련이는 눈앞이 캄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