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깐=NC】 애덕(愛德)의 신부로 알려진 복자 원선시오.마리아.빨로티가 1월20일 시성(시聖)된다. 1850년에 서거한 빨로티 신부는 오늘날 전세계에 2,200명 회원을 가진 빨로티 신부회를 발전시켰다.
■ 聖人生涯
복자 원선시오.빨로티는 1798년 4월21일 「로마」에서 탄생 유복한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유년기부터 성자의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1820년 5월14일 사제에 서품되었다. 그 해 7월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로마」 신학교에서 교수생활을 지냈다. 그는 교수에 두각을 발휘했으나 10년 근속 후 그가 열렬히 지원한 본당 신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빨로티 신부의 명성은 「로마」 거리에 퍼져갔다. 그는 장시간 고해소에서 지내고 병원 및 환자들의 병문과 죽는 자들을 위로했다. 어떤 신부이고 들어오면 죽이겠다고 권총을 베개 속에 감추고 있는 임종자를 여장(女裝)으로 방문했다는 말도 있다. 빨로티신부는 노동조직을 만들고 그들과 가난을 타개하고 그들의 사업에 관한 것을 의논했다. 그들의 직업에 자존심을 가지게 했다. 고용자들을 설복하여 노동을 개선시켰다. 부녀자와 특별히 일하는 아동들을 보호할 집을 짓고 아이들을 위한 야간학교를 경영했다.
1834년 그의 활동을 찬양하고 그를 돕겠다는 신부 평신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는 조직의 필요성 및 「로마」 이외의 곳에서의 사도직을 깊이 생각했다. 이듬해 성청허가를 얻어 가톨릭 사도직회를 조직 종도의 모후 성모를 주보(主保)로 출발했다. 평신자의 제3회원을 허락했다. 오늘 그 회원은 20만을 넘는다.
그는 육체적으로 보속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4시간 수면에 마루에서만 잣다. 그는 맨발로 다니는 때가 많았다. 걸인에 신을 벗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직업학교를 세우고 농업기술 향상에도 진력했다. 1837년 「로마」 애호열자가 휩쓸 때 그와 회원들은 임종자들을 돕기에 전연 자기 몸의 희생을 돌보지 않았다. 그는 동방 그리스도교도와의 재일치 8일간 기도운동을 설정했다. 이같은 간단 없는 활동을 계속하던 중 1850년 1월22일 사망했다. 그의 친구였던 교황 레오 13세는 그의 부음을 듣자 즉시 성인이라고 불렸다.
1887년 가경자(可敬者)로 1950년 그의 백주년에는 복자가 되었으며 1953년 그의 시성조사(시聖調査)에 제출된 두 개의 영적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