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立小鹿島更生院(국립소록도갱생원) 人口(인구) 6千3百(6천3백) 餘名(여 명)
40萬坪 小王國
檢問所를 基点으로 두 세계
張順業氏가 2千名 入敎케
舊弊들 없어져
발행일1963-01-27 [제360호, 3면]
【小鹿島에서 尹光宣 記】 섬이라 하지만 「녹동」과는 강하나 넓이에 불과한 좁은 내해(內海)를 사이에 두고 있어 양편 부두에서 큰 소리로 외치면 대화(對話)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
그러나 건강 사회와 병자들의 사회라는 엄연히 다른 두 세계의 경계(境界)…
현대의학의 발달로 나병도 이제는 완치할 수 있고 또 현재 이 소록도(小鹿島)의 환자들 70%는 음성(陰性)으로 되어가고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녹동에서 소록도로 건너가는 배를 타는 환자들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희망을 버리고 다시 못 올 길을 떠나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1816년 자연경치 아름다운 이 섬의 서편 구북리(舊北里)에 『자혜의원』을 개설하여 일반 환자들도 치료하는 한편 나환자 1백명을 수용하고 치료한 것이 시작으로 그 후 1932년 당시 국내 각지에 떠돌아 다니는 나환자들에 대한 구휼대책이 절실하였음에 따라 사회 각 제각층의 온정으로 거액의 재정이 거두어져 『조선예방협회』가 창설되는 한편 이 섬 전체를 매수하여 3개년 계속사업으로 공사를 시작 2차 3차 공사를 거듭하여 사무본관 치료본관 병사(환자주택) 기타 공장과 기관 등 건물 1천50동을 준공하고 제반시설이 완비되어 한 때는 환자 6천1백명을 수용하기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가장 큰 요양소로 발전한 것이 『국립 소록도 갱생원』의 연혁(沿革)이다.
둘레가 40리 면적이 40만평 되는 따뜻한 이 섬에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여러 시설들이 훌륭하게 마련된 가운데 생존경쟁을 모르는 환자 5천2백 수십명과 직원 및 가족 1천여 명이 하나의 딴 세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울창한 수목과 깨끗한 도로와 아름다운 공원과 운동장 교회 그리고 질서정연한 사회 조직 등 원장은 의사이지만 행정자이기 때문에 병원사무본관은 병원이라기 보다 군청이니 읍사무소 같은 인상이다. 사무본관이 있는 직원 지대와 치료본관이 있는 환자들이 사는 병사(病舍) 지대는 철조망은 없어도 엄격히 구분되고 격리되어 직원지대에서 병사로 들어가는 출입대문 부근에는 양지대에 각각 검문소가 있어 특별한 허가 없으면 환자와의 면회는 대개 이 앞에서 하게된다.
병사 지대에는 총병사부가 있어 총병사장 아래 교육반장 치료반장 경비반장 건설반장 등 각 부서의 역원은 환자들로서 원장이 임명하며 조무원(助務員)이라 하여 공무원을 보조한다는 뜻인바 이 조무원들이 환자들의 대표인 것이다. 병사지대는 그 안에 장안리, 중앙리, 신생리, 구북리, 서생리, 남생리, 동생리 등 7개 부락으로 나눠져 있고 대개 가정생활을 하고 있지만 독신자들은 독신병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데 가정생활 하는 이들보다 불편한 것이 많다.
종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뿐으로 불교신자는 그 수를 알 수 없고 성공회 신자가 15명 무종교자가 약 1천명인데 「프로테스탄」은 이 갱생원 창설 당시부터 포교활동이 시작되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독무대로 신자 수는 한 때는 4천여 명이었으나 가톨릭교회의 진출 후로는 교세가 위축되어 가고 있어 그 반발과 시기가 대단하다. 현재 가톨릭 교우는 1천3백명이지만 그들은 아직 3천명으로 다수파(多數派)이다. 지난날 자유당정권시에 그들은 관권(官權)과 야합하여 가톨릭신자는 야당이라고 이런 세계에서만이 감생할 수 있는 온갖 박해를 교우들에게 가한 사실은 우리 기억에 생생하다.
헨리 대주교님의 특별한 관심과 적극적인 원조로 광주교구 전체로도 둘째로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 3년 전 병사지대 동생리에 건립되고 또 현재 직원지대 성당을 증축 중에 있는 이곳의 사목(司牧)은 골롬반회원 제임스.미카엘 권신부님이, 그리고 비르짓다 고 수녀를 분원장으로 「카리따쓰」 회원수녀 네 분이 직원지대 서관사에서 「보육소」를 경영하여 세 살에서 국민학교 졸업나이의 미감아동 2백18명을 맡아 기르고 국민학교 교육을 시키며 「그리스도왕회」 소속 오지리인 미쓰·월모와 미쓰·마리아나 두 동정녀가 직원지대 동 관사에서 두 살 아래의 젓먹이들을 기르는 「유아원」을 경영하고 있어 신앙에서 우러난 사랑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숭고한 봉사를 하고 있다.
한편 소록도에 가톨릭이 진출하고 오늘날의 교세 발전을 보기까지에는 방지거·장(張順業)씨의 숨은 공로를 잊을 수 없다. 그는 1935년 18세 소년 때 환자로 이곳에 와서 자기의 신앙을 굳게 지켰을 뿐 아니라 한 사람 두 사람씩 전교하기 시작한 것이 현재 이 섬 신자 과반수 이상이 그의 인도로 입교하였으며 또 이곳에서 다른 수용소로 간 교우들은 모두 장씨의 지도를 받았으니 그가 전교한 수는 약 2천명에 달한다는 바 헨리 대주교님은 그를 가르쳐 『소록도에 묻혀있지만 않았더라면 참으로 교황훈장감이라』하셨다 한다.
5·16 후 조창원(趙昌源) 대령이 원장으로 부임하여 과거의 악패를 통쾌하게 정리하고 환자들을 위해 새로 착수한 웅대하고 고무적인 오마도(五馬島) 개척사업에 대해서는 지면사정으로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