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歐(서구)의 「癩(나)」 衰退史(쇠퇴사)
한센氏_發見에 이르기까지
발행일1963-01-27 [제360호, 4면]
성왕(聖王) 루이9세 치하의 프랑스에는 약 1500개의 나병원이 있었다. 그러나 각 시대의 나환자 실수를 추산할 근거는 없으나 13세기경 수용된 환자수만을 헤아렸다는 사실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것이 14세기 이후 격감되었다는 것은 다음 사실로 예증(例證)된다.
즉 1351년 빠리대교구 나병원 감독관이던 쟝.더.빌스프랭의 관내 검열기록에 의하면 그 관하의 47나병원의 입원호나자는 불과 35명이었다. 기.빠뗑의 기록에 의하면(1665년) 그 당시 빠리 시내에서 나환자를 볼 수는 없고 몇몇 지방에 아직 있는듯 하다고 했다.
베르기의 뗄티겐 나병원 입원자 101명 중 진성환자는 47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1556년 5월4일 조사기록)
이렇게 북구(北歐)를 제외하고는 서구·중구 등의 나병은 근세에 들어서면서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근세의 나연구는 다니엘.다닐센(1815-94)이 1839년 벨겔의 성욜겐병원서 시작해 왔다고 할 만하다. 수년 후 칼.헤벡(1808-75)이 그의 일을 분담하기에 이르러 나병연구의 실마리를 장만했다. 전자는 주로 임상적 병리해부학적 연구를 했으며 후자는 영·불·독 희랍 등을 편력하면서 그 지방의 나병과 그 예방법을 조사했다. 이 두 부분은 그 당시의 절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유전설(遺傳說)을 주장했다.
여기대해 처음은 통계 분포상태에 많은 의심을 품은 겔할트.한센(1841-1912)은 나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반드시 고유의 병원체(病原體)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병원체로 전염할 것이라는 상정(想定)아래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1871년 이미 다닐센에 의해 지적되었고 월휴에 의해 BRAUNEELEMENTE라 명명한 바 있는 「나」 특유의 세포 중의 간상균을 인정하고 이를 나균이라고 단정했다. 그 후 나이셀이 와이겔트와 고호 등이 결핵균에 사용한 염색법(染色法)을 한센균에 응용하여 추가 시험한 결과 차차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획기적 발견의 경과를 한센씨 자신이 1909년 제2회 국제나학회의 강연 중 극히 객관적으로 꾸밈 없이 보고하게 되었다.
이 강연은 「나」학계의 위인(偉人)의 풍모를 보여준 인상적인 것이었다.
(岩下壯一全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