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우리 손으로 도울 때가 왔다
발행일1963-01-27 [제360호, 4면]
세계 구라사업(救癩事業) 기념일을 맞이하여 나의 느낀 몇 가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처참한 생활을 하는 나환자들은 누구보다도 도움을 받고 동정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세상은 여기대해 너무나 무관심하고 냉정하였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이러한 불쌍한 환자를 구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개시하여 물심양면으로 환자를 위로하는 기념일을 제정했으니 누구보다 환자 자신들의 큰 위안의 날이 아닐 수 없다.
고국을 떠나 수십년 그 동안 우리 나라에는 많은 변동이 있고 고국의 실정을 모르는 나로서는 적절한 소감을 말할 자격이 없으나 대구대교구에서 경영하는 고령(高령) 나환자 수용소와 칠곡(漆谷) 나환자병원에서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을 적어보려 한다.
대구 서대주교님과 야고버.이부주교님은 특히 구라상버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신다. 또 이 사업에 책임자인 루디.서기호 신부님과 환자치료를 담당하고 계시는 엠마.후라이싱가양(오지리 출신 평신도)의 초인간적인 활동에는 누구나 머리가 숙여진다. 특히 엠마양은 대구서 고령 구지(求智)까지 비가오나 눈이오나 약속한 그날은 뻐스를 타고 반드시 와서 치료하고 그날로 대구로 돌아간다. 양의 손은 얼어 터졌고 겨울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낙동강 나룻배를 건너다가 물에 빠지기까지 하면서도 언제나 웃으며 봉사한다.
언젠가 『엠마씨 당신은 이런 무서운 환자를 치료하면서 겁이나지 않습니까? 만일 전염하면 어떻겁니까?』고 물었더니 『조금도 무섭지 않습니다』고 한다. 그 뿐이랴. 『천주님이 만일 이 병을 나에게 주시면 나는 감사하겠읍니다. 지금은 좋은 약이 있으니까 병들면 여섯달만에 거뜬히 낳을 수 있읍니다』고 농담까지 한다.
그러나 엠마양이 『한국 젊은 여성들 중 이런 구라사업에 자칭 일하고자 하는 분이 적은 것은 이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일에 공명하는 여성이 많습니다』고 할 때는 아찔하다. 작년 가을 루이세양이 엠마양을 도우려 내한하여 지금 우리말을 공부하고 있고 또 재학 중인 두 간호원도 뒤이어 나올 것이라 한다.
루디 신부님도 이 일을 시작한 후 참으로 놀랄만한 활동을 했다. 여러 가지로 바쁘시면서 시간을 만들어 고령까지 자주 나가 환자들을 위문하여 무엇이 필요하다면 자기는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까지 아낌 없는 도움을 베푸셨다. 지금은 대구의 「간호센터」에서 한국인 간호원 삼명이 계속 교대로 고령에 나와 거주하면서 날마다 환자들을 치료하고 남은 시간에는 교리 성가를 가르치면서 한집안 식구와 같이 자미있게 지낸다.
신부가 나병에 걸리면 신부사회에 치욕꺼리로 생각하는지 이런 사람과 동거하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라고 말하는 신부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대단히 부끄럽고 미안하였다.
한하운씨 시집(詩集)에 이런 말이 쓰여있다고 한다.
『나는 사람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요 나는 문둥이다.』라고
그러나 천주의 사랑을 가르치고 인류애(人類愛)를 선전하는 여러분인지라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대구교구에서 경영하는 나환자 수용소 비용은 오지리나라 신자들이 대제를 지키고 혹은 생활비를 절약하여서 모은 돈이다.
그러나 가정을 떠나고 사회사람과 같이 활동을 하지 못하는 환자들 생활은 처참하고 동정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재래의 생각을 버리고 문명국가 사람들이 환자들에게 하는 사랑의 태도를 본받아 우리나라 환자는 우리가 구하겠다고 새악하면 얼마나 다행할까!
한달에 하루를 나환자들을 구하는 날로 정하고 각 가정에서 주인은 술과 담배를 절약하고 주부는 반찬값을 절약하고 아이들은 심부름 가서 얻은 돈을 절약해서 모은 돈들이 비록 약소하겠지마는 전신자 가정이 이 일에 공명하여 실시한다면 지금 경영하는 나환자들 생활은 넉넉히 보장될 것이며 외국의 원조를 받지 않더라도 우리의 힘으로 이 불쌍한 형제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적은 형제에게 하는 것은 나에게 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이러한 기특한 행동을 얼마나 즐거히 보시고 강복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