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11) 夜暗(야암) ③
발행일1963-01-27 [제360호, 4면]
『잠시 동행 하십시다.』
언성은 나직하나 사북경관의 눈치는 심상치 않았다. 수련이는 직각적으로 인천 송도에서 일어난 홍전무의 자살미수 사건에 걸려든 것이라 생각하였다.
만일에 옆에 안명철이만 서있지 않았더면 그는 꺼릴 나위 없이 형사를 따라가서 자기의 입장을 선선히 밝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던 박영진(朴永進)의 소식인가.
까딱하다가는 겨우 움켜쥔 새로운 희망이 허술하게 살아질 위기에 부닥쳐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좋으랴. 만일에 이대로 경찰서로 끌려가보면 안명철이와는 길이 또 갈릴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다. 그 결과는 내다보이는 듯하다.
술집에서 형사에게 끌려가는 현장을 목격한 안명철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이 일이 박영진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면 만사는 그 자리에서 끝장이 나는 것이다.
변명 한 마디 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어찌 당할 일이랴.
수련이는 어쨌든 「남령·빠」 문전에서는 속히 빠져나오는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한걸음 앞서서 수련이를 지키는 형사의 눈초리를 느끼면서!
『저 안선생님 미안하지만 저 샛골목까지 따라와주세요. 네!』
어찌된 영문을 모르고 주춤하고 있던 안명철이라는 사나이는 다만 한 마디
『네』
그것도 나직한 대답을 했다. 수련이는 고개를 수기고 형사의 뒤를 따랐다. 거리에는 이미 야색(夜色)이 짙었다.
「남령·빠」에서 큰 길까지 나아가는 백「미터」 남짓한 사이에서 수련이는 안명철이와 다시 만날 약속이라도 든든히 해두려는 속셈이다.
『안선생 참 안됐읍니다』
『도대체 웬일입니까』
『아무 일도 아닙니다. 곧 돌아와요. 절대 아무 일도 아닙니다. 내일 꼭 한 번만 더 만나주세요. 어디 계신지 제가 찾아가겠어요』
『내일 그렇게 나오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그럼 저…』
하는 순간 형사의 거센 팔이 수련이의 소매를 끌어 저쪽으로 갈라세우더니
『이냥반 괘니 이런 짓하면 못써요. 무엇하러 쫓아와요. 어서 저리 가요』
인정사정 없이 안명철을 반대쪽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안선생님…』
수련이는 마지막 한 마디를 들어두려고 필사적이다. 그러나 형사에게 무안당한 안명철은 기가 질렸는지 대답도 없이 멀어갔다.
『어서 가요. 괜히 중간에서 꺼지면 나만 곤란해요…』
형사는 수련이 옆에 바짝 다가서며 손끝으로 등을 밀었다.
『아는 사람 만나더라도 고개를 수기고 모른척 하고 가요. 큰 길에 가서는 「택씨」를 탈테니…』
수련이는 기가 막혔다. 어쩌다가 하필이면 오늘 이 시간에 이런 일을 당했는지 가슴에서 불길이 타오를 지경이다.
『그러지 말고 저쪽으로 돌아가요. 아까 그이 꼭 좀 만나 한 마디 들어야 해요』
이제는 약이 올랐다. 수련이는 곧 안명철이의 뒤를 쫓으며
『절대 달아나지 않아요』
뒤따르는 행사에게 소리쳤다.
『아-니 당신 이러기야!』
행사는 기어코 수련이의 팔을 움켜잡았다.
『안선생님!』
수련이는 한 팔은 형사에게 잡힌채 안명철이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안명철이는 보이지 않았다.
『난 저이 만나지 못하면 숫제 죽는게 나요…』
수련이는 넋을 잃고서 울기를 시자했다.
『내일 나와서 만나면 되잖소. 하루 저녁 못 만나서 죽을 지경이라니, 그건 너무 대단한데…』
형사도 인젠 슬그머니 비웃기에 이르렀다.
『애인이 아니란 말야요』
『그럼 더 더군다나 울 건 없잖아요』
『애인보다 더 한 사람야요』
『난 그런 촌수는 몰라요』
『우리 미남이 아버지 소식을 아는 이야요. 저 일 놓치면 큰일나요』
『뭐구 뭐구. 없어진 걸 하는 수 있어요. 어서 밤늦기 전에 빨리 갑시다. 어서 가요』
당황했던 가슴이 가라앉게 되자 수련이는 용기가 솟구쳤다.
『도대체 나를 잡아가는 거요 뭐요. 영장 좀 뵈주세요』
『체포는 안야요』
『영장도 없이 잡아가긴 누굴 잡아 가겠어요. 오늘은 내 일생에 관계되는 일이 생겨 못 가겠으니 이러지 말고 그냥 가세요. 명함을 주시면 내일 시간 중에 자진출두 하겠어요』
수련이의 음성은 떨렸으나 말은 야무졌다.
『좋아요. 자… 명함 드리리다. 꼭 와야 해요』 형사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명함을 꺼냈다.
『이게 뭐야요. 잃어버린 사람을 어디가 찾느냐 말야요』
정말이지 형사가 무한 원망스러웠다.
숫제 「남령·빠」 안에서라도 이런 일이 생겼더라면 순옥(順玉)이의 도움이라도 받았을 것을 운수산바게 문턱에서 만나 숨쉴틈도 없이 끌려나서고 만 것이다.
그도 진작 검사의 영장이 없이는 인신의 구속은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더면 어떻게 되었을 것을 당황한 나머지 모두 시기를 잃고만 것이다.
『그럼 내일 꼭 출두해요. 내일 소식 없으면 정식 구속당해요.』
경찰관의 위신이라도 세우려는 듯 엄숙히 한 마디 하고 뚜벅 뚜벅 걸어가고 말았다. 수련이는 현기증을 느꼈다. 불과 오분도 되지 못한 짧은 시각에 너무나 벅찬 일을 겪은 까닭이리라. 그는 전선대에 한 팔을 짚고 눈을 감았다.
『안명철이를 어디가서 찾느냐』
눈 앞이 캄캄하였다. 그는 어쨌든 안명철이가 사라진 동쪽 뒷골목으로 찾아들어섰다. 연달아 붙어있는 작은 술집들. 그 집을 한 집 한 집 뒤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첫째 그럴 용기가 없다. 염치를 덮어놓고 기웃거리는 일이 그리 쉬울리 없다.
『오냐 순옥이한테 물어보자. 혹시나 안명철이가 연락을 해두고 갔는지도 모를거야.』
수련이는 오늘밤은 죽어도 「남령」으로 도루 들어갈 기분이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순옥이에게는 전화를 걸어 자동전화를 찾아서 곧 말을 통했다. 순옥이는 벌써 취한 음성이었다.
『누…누구야 날 찾는게 누구야?』
『이애 순옥아 나야 나 수련이야』
『아니 너 지금 어디서 무엇하구 있어 「샴펜」병이나 터트릴 손님을 슬적 달고 나갔다구 마담이 저기압야.』
『알구 나온게 아니지 않아.』
『그래 어쨌든 경과보고 좀 해 봐!』
『손님을 잃어버렸어.』
『뭐 날렸어!』
『응. 온데간데가 없어!』
『거 무꾸리 가야겠구나』
『그러지 말구 아까 나하고 같이 나온 분 들어가지 않았니』
『아니 오긴 언제와』
『그래…』
『이 바보야 돈지갑을 꼭 쥐고 다닐 일이지』
『글쎄 돈지갑이 아니라지 않아』
『오… 그렇댔지 내가 좀 취했어. 술 마시구 싶어 취한게 아니라 돈 벌려다 취한거야 난 금주법에두 안 걸린단말야』
순옥이의 취한 수작은 걷잡기 어려웠다. 수련이는 전화통을 놓고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면 만날까. 짧은 반생이긴 하지만 이렇게 초조해서 사람을 찾아보기는 처음이다.
생각할수록 분한 것은 안명철이가 돌아서 갈 때 곧 쫓아가 붙들고 마지막 한 마디를 들었어야 했을 것을 그걸 못 한 것이다. 우선 떨렸던 까닭이다.
인천 송도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어쨌든 한가닥 관련은 있는지라… 수련이는 여기서부터 떨기 시작한 것이다. 상을 타라오래도 경찰서는 들어가기 싫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경찰서란 양민과는 인연이 먼 곳이다. 더우기 젊은 여자가 경찰에 드나든다는 것은 분명 남자 이상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죄가 없느니, 억울하니, 하는 것은 다 한 번씩 하는 소리요 경찰서에 끌려 들어간다는 기분은 즉각 석방이 된다해도 무겁고 불안하다.
수련이는 어느덧 발길을 명동고개로 옮겼다. 어디로 간다는 목적이 있을 리 없다. 그저 그냥 걷는 것이다. 인생은 걷는 것이라는 타고난 부역을 몸소 실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개 위에 올라서니 진영이가 누워있는 성모병원 성모님을 모신 동굴에는 조명이 은근하고 백합꽃 빛갈 성모상은 빛을 받아 따사롭다. 수련이는 성모상 앞에 가서 무릎을 꿀었다.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감았다.
『성모 마리아시여!』
그 이상 할 말을 몰랐다. 그저 눈에서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