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週間世界(주간세계)] 한국敎階制(교계제) 設定式(설정식) 參禮記(참례기)
任命狀(임명장), 빨리움 傳達(전달) · 着座式(착좌식)
定住(정주) 主敎座(주교좌)로 올림을 받아
발행일1962-07-08 [제334호, 1면]
6월 29일 하오4시, 역사적 한국 가톨릭 교계제 설정식전이 이곳 명동 서울대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되었다.
하오4시 15분전 대성당 안팎은 입추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다만 초청인사들만이 지정석에 안내를 받을 수 있었고.
이윽고 십자가와 양촛대를 선두로 한 주교들의 입당(入堂)행렬이 정문을 들어섰다. 대신학교 합창단의 주교들을 환영하는 그레고리안 성가(聖歌) 그리고 이날 처음으로 사용하는 명동대성당 새 파이프 올간(미국에서 1만불로 도입했음) 반주는 장내를 휘돌았다. 고위성직자들은 서열(序列) 순으로 제대쪽을 향해갔다. 광주 김 몬시뇰이 그 첫머리에 섰다. 여덟번째로 최연장자이며 또한 오래된 대전 라리보 원 주교님, 그뒤로 대주교 위에 피선된 광주 하롤드 현 대주교, 대구 서(徐正吉) 대주교, 그리고 노(盧基南) 대주교 그뒤로는 전 성직자들이 줄을지었다. 4시5분 임당식은 끝났다. 귀빈석에는 외교사절단을 대표한 샹발 불란서대사 그 옆으로 서독대사 중국대사 그리고 영국대사가 착석하고 그 뒤로 유엔군대표와 일반 외교관들이 열석했다. 국내 귀빈들은 그 위에 자리잡았다. 일반 신자석은 지방교우들에 우선을 준 것 같았다. 무튼 교황사절 지굼대리가 봉헌하는 사은(謝恩) 대례미사는 4·45분에 끝났다. 성가는 대신학교 합창단이 맡았고. 미사 끝에 무튼 사절대리의 강론이 있었다. 성청 포교성성장관 아가자니안 추기경으로부터 온 축하 멧세지 전문(電文 · 記事參照)을 읽은 다음 요지 다음같이 말했다. 무튼 몬시뇰은 『우리 한국의 가톨릭 교회는 이제 겨우 1백년을 경과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1세기라면 인간의 수명으로 보아 길게 보일지도 모르나 가톨릭 교회의 2천년 역사로 보아서는 그야말로 짧은 기간입니다. 불과 한세기 전까지도 한국에서 가톨릭교회는 갓난아기였읍니다.
오늘 한국 교계제도의 창설로서 한국의 교회는 1백년 동안에 거대한 발전을 수행했다고 결론 지을 수 있었읍니다.』고 하고 1831년 로마성청은 한국에 대목구 즉 조선교구를 창설했었는데 그간 혹독한 박해가 있었다고 했다. 대체로 1866년부터 교회는 건실한 발전을 해갔다.
1892년에 설립된 용산신학교는 발전을 계속하여 1940년 경에는 1백39명의 한국인신학생을 교육하고 있었다. 1945년에는 국토가 양단되었지만 이남은 더욱 발전하여 1949년에는 주한교황사절관이 설치되었다.
지금 한국에는 2개 대신학교가 있으며 각종 수도자들의 성소도 날로 증가되고 있다. 근5년간에 신자수는 2배로 증가했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가톨릭신자 수는 전 인구의 2% 불과하지만 그 2%는 그 몇곱절 되는 일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한국에 교계제도를 능히 시행할 자격을 구비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무튼 사절대리의 강론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빅또리노 윤(尹恭熙 博士) 신부가 통역했다. 사절대리는 정확한 라띤 발음에 주의하면서 교황 요안 23세 성하의 교계설정 교서를 봉독했다. 이때에 주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끝까지 엄숙한 자세로 교황 성하이 명령을 받들고 있었다. 이 또한 윤신부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윤신부는 동칙서(勅書)를 일일히 장중한 용어로 번역하여 인상깊게 하였다. 또한 인상적인 것은 평양 홍(洪龍浩) 주교를 다께오까(竹岡) 홍주교라고 호명한 것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두절된 이북의 교회사정을 상기시켜 애절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었었다.
교계제 설정식의 촛점(焦点)에 도달했다. 사절대리는 제대상단에 서서 각 주교들에게 임명장을 전달했다. 교황을 대리하여 교황의 지극히 공경하올 형제들에게 본교구 첫번 본주교로 임명하는 칙령을 수교하고 있는 것이다. 사절대리는 임명장을 전달한 다음 미소를 지으면서 일일히 악수를 교환했다.
이어서 3대주교에게 대주교 휘장인 빨리움을 전달했다. 3대주교는 나란히 서서 빨리움을 양손으로 수여받았다.
이것으로 아니 이 역사적인 순간으로 한국가톨릭 교계제도는 탄생된 것이다.
계속해서 서울 노대주교 각하의 착좌식(着座式)이 거행되었다. 노대주교께서는 제대 좌편으로 가서 대주교 예장에 관을 간추고 사절 대리의 손에 이끌려 대주교좌로 등단하고 합창대는 천주성신께 드리는 성가를 불렀다.
『천주여 착한 목자를 간택하신 당신은 복되도다』고 하면서.
사절대리는 대주교 목장을 집허주면서 예절을 집전하는 경문을 읽어갔다. 노대주교께서는 이제 대주교좌에 착좌했다. 서울대교구관 내 모든 신부들은 다시 한번 순명을 표시하는 뜻으로 대주교좌 앞에 무릎을 꿇고 노대주교의 가락지에 친구했다. 이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신자들은 다만 묵묵히 마음으로 저마다의 순명을 발했다.
이로써 교계제도 시행(施行)과 더불어 서울 명동대주교좌의 착좌식이 제일 먼저 끝난셈이 된다. 사절대리의 선창(先唱)으로 사은(謝恩) 찬미가 떼데움을 종곡(終曲)으로 종결되었다. 끝내 성당 안에 들어오지 못한 교우들과 성당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종현뜰은 발길을 옮길 수 없다. 왜 성당 안의 진행광경을 마이크로라도 전해주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다. 그들은 된 햋볕 아래 웅성그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문화관에서 열린 간소한 칵텔 파티로 이날의 식전은 전부 끝났다.
우리는 무진박해를 겪은 후 1882년에야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로마 성청으로부터 대목교구인 조선교구를 설치한지 131년만에 52만 가톨릭신자를 포용하는 한국의 가톨릭을 건설함과 동시에 마침내 교회법상의 모든 보장을 받는 자치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각 본교구의 본주교 착좌식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