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12) 祈求(기구) ①
발행일1963-02-03 [제361호, 4면]
성모 마리아님 앞에 무릎꾼 수련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한 일은 없다. 따라서 교리도 기구하는 예절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 완전히 자비로우신 성모님의 따뜻하고 너그러우신 품에 안겨있다. 어느 독신자에게도 이렇게 참된 기구는 그리 흔치 않으리라. 서울이 넓다해도 모두가 남이다. 차가운 눈초리 뿐이다. 제각기 저 살 길을 찾느라고 남이사 울든 짜든 아랑곳이 없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외로움에 허덕이게 마련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고민과 불만을 품고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서로 엉키지 못하고 흩어져 사는 것은 숫제 타고난 팔자로 돌리고 있다.
수련가 인천송도에 간 것도 자기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걸려들고 보니 경찰에서 오라기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하필이면 기다리고 고대하던 박영진의 소식을 전하러 온 안명철이와 만나는 날 밤에 형사가 찾아오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비록 안명철이를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가는 곳이 술집이요 찾아오는게 경찰서 형사라면 과연 수련이의 입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구를 보고 이 기맥힌 사정을 하소 할 것인가. 누가 있어서 수련이를 위기에서 건져줄 것인가. 일이 이렇게 되고보면 시골집에 있는 어머니는 있으나 마나다. 촌에 묻혀사는 노인이 무슨 수로 이런 일에 나설 수 있겠는가. 어머니조차 아랑곳 하지 못할 이 고달픈 고비는 아무에게도 도움은 빌 수 없다.
수련이는 마치 층암절벽에 이마를 부딛힌듯 아찔했다. 오로지 바라고 빌 곳은 마리아님 뿐인양 수련이는 마냥 울고만 있다.
만일에 안명철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경우 수련이는 어찌될 것인가. 술을 마시고 너털웃음을 웃고 아무에게나 「윙크」를 던지는 진영이나 순옥이 꼴이 될지도 모른다.
깨끗이 살려면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생각이 수련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진영이가 가볍게 권하는 소리에 마음이 쏠려서 어쨌든 술집에 나가서라도 돈이나 벌구 볼 일이라는 옅은 판단이 오늘의 이 고민 이 위기를 빚어내고 만 것이다.
(어디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 하나만 깨끗이 가지면 그만이다)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한 목 벌어서 미남이와 걱정 없이 살아보자는 욕심이 오늘의 이 쓰라림을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백하다』
아무리 소리친들 곧이 듣는 이가 없으면 헛일이다. 지금 수련이는 오로지 성모님만이 자기의 깨끗한 심정을 알아주실 것 같아서 여기에 무릎꿇고 있는 것이다.
성모병원도 알려드는 구급차의 「싸이렌」 소리가 수련이의 넋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눈을 떠보니 세상은 여전히 이대로 돌아가고 외로운 그림자만이 수련를 뒤따랐다. 맥이 빠져 반걸음조차 잘 내키지 안컷만 그래도 집이라구 영천 언덕을 찾아들었다. 안 집 아주머니는 쫓아나오며-
『아니 오늘은 웬일이유 벌써 들어와…』
의아한 표정이다. 자정이 가까와서 으레껏 순옥이와 같이 돌아오던 수련이인 까닭이다.
『아니 손님이라두 같이 왔어?』
아주머니는 눈이 둥그래서 수련이의 등 뒤를 보살핀다. 순옥이랑 진영이는 마음 맞는 술손이 있으면 일찌감치 손님을 끌고 집으로 오는 일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수련이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던지라 아주머니는 고개를 개웃뚱했다.
『온 아주머니두 내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요』
『글세말야 깜짝 놀랐지 뭐야』
『몸이 고달퍼서 일찍 좀 쉬려구 먼저 들어왔어요』
『그럼 내 저녁 곧 채려줄게』
『저녁은 그만 두겠어요』
밤에 나가는 아가씨들은 아침이 점심 때요 저녁은 한밤 중이 된다. 완전히 밤과 낮을 바꾸어 사는 인생들이다. 수련이는 곧 방에 들어가 옷도 가라입지 않고 그냥 덜컥 누웠다. 완전한 패배자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하늘만 쳐다보는 심정이다.
『참 내가 깜빡 잊었지 뭐야. 아까 저녁 때 웬 점잖은 손님이 찾아왔었어』
『그래요…』
『「남녕빠」로 만나러 간다고 그러든데』
『그럼 「남녕빠」는 아주머니가 일러주셨군요』
『꼭 좀 만나야겠다기 옷채림이나 풍채가 좋은 손님같기 일러주었대두』
『그건 왜 일러주세요 뭐하려구 일러주냐 말야요.』
수련이는 참고 견디던 울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숫제 어이가 없는 태도다.
『아니 알려준게 뭐 나뻐… 돈 쓰는 손님이 찾아가야 영업이 되는거 아냐.』
아주머니의 생각은 이렇다. 인물이 어여뻐 「빠」에서 돈 잘 버는 것을 인생의 최대의 출세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수련이의 사정을 알리가 없다.
『그만두세요. 아주머닌 아무 잘못도 없으세요. 제 팔자죠』
수련이는 모든 것을 팔자로 돌리려했다. 그럴 수밖엔 없는 까닭이다.
『그래 그 이가 우리 집은 어떻게 알구 왔대요』
『그건 안 물어 봤지 뭐야.』
『어디서 알았을가』
『글쎄 듣고보니 좀 이상한데 어디서 알았을가』
『뭐 이왕 알구 찾아온걸…』
『그래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군데… 그렇게 찾아다녀』
『꼭 만날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요』
『만나봤나!』
『만나긴 했지만- 무슨 일이 생겨서 아무 말도 못 듣고 그만』
『왜 쌍알이 걸려서 사랑 쌈이라두 났던가, 에-이.』
아주머니의 생각은 언제나 마구 노는 아이들의 사랑싸움 손님싸움밖엔 모른다. 벌써 십여 년째 술집에 나아가는 여인들에게 방세를 놓고 밥을 지어먹이며 근근이 살아온 그인지라 허는 수가 없다.
『그런게 안야요. 더 묻지 마세요』
수련이는 아주머니의 허튼 수작이 몹시 역겨워 소리를 쳤다.
『예이 하필이면 좋아하는 손님이 한 날 한시에 맞우쳤을까』
아주머니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수련이는 울컥했다. 자기가 누워있는 이 방에서 십여 년 동안 가지각색의 여인들이 무수한 사나이들과 추잡한 거래를 했는가 생각하니 마치 시궁창에 빠진듯 몸이 옥으라들고 진저리가 났다.
『내가 미쳤지 왜 이런 구렁에 빠졌던가』
지금에 후회한들 미칠 바 아니나 가슴에 서렸던 쓰라림이 불긴같이 타오름을 걷잡기 어려웠다.
『아주머니…』
순옥이의 피곤한 음성이다.
『순옥이냐』
『네…. 수련이 안 들어왔어요.』
아주머니는 대답 대신 수련이가 누워 있는 방을 가리키고 입을 비쭉했다.
『수련아』
순옥이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수련이는 옷을 입은채 그대루 누워있었다. 잠이 들었는지 대답이 없다.
『글쎄 얘야. 너 어디 갔었니』
역시 수련이는 대답이 없다.
『그 손님이 나중에 또 왔지 뭐야! 그래 갔군 술 한턱 잘내구 모두들 「팁」 한 장씩 다-받구…』
만사가 귀찮아 못 들은척 하던 수련이도 그 손님이 다시 찾아왔다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온 애두 자지두 않으면서 대답도 안 해』
『그래 그 손님 어디루 갔니 응 어디 있대』
수련이는 제우쳐 물었다.
『흐…흐… 도대체 그 이가 누구냐』
『왜』
『글세 네 내력만 꼬치 꼬치 묻잖아. 남편은 있느냐 언제부터 나왔느냐 나중에 가서는 아들 아이가 하나 있을텐데 잘 자라느냐… 뭐 꼭 형사같아』
『그래 그 대답은 누가 했니』
『내가 했지』
『뭐라구?』
『애두 몸이 바짝 달었구나. 돈도 잘 쓰고 술도 잘 마시구 스타일두 근사하구 모두들 달라붙으려구 야단들이지 뭐야』
『글세 무엇이라구 대답을 했냐 말야 그 말 좀 어서 해 바』
『뭐라긴 뭐래. 남편은 업고 품행은 단정하고 아들아이는 안양에서 외할머니와 같이 산다구 그랬지』
『……』
『아니 내가 뭐 잘못 대답했나?』
『그럼 또 언제 온다구 했니』
『뭐 「호텔」에 묵는다니 한 번 더 온다긴 했지만 술꾼들의 허튼 수작 믿을 수 있어』
『「호텔」은 어디래』
『뭐… 「사보이 호텔」이라나』
『사보이 호텔?』
『음…』
수련이는 새로운 희망이나 찾은듯 눈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