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40) 아메노칼의 동무 ③
발행일1962-07-08 [제334호, 4면]
「타만라세트」에 도착하자말자 그는 「투아레그-프랑쓰」 「프랑스-투아레그」말의 완전한 자전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이처럼 쉴새 없는 일만 하더라도 울타리를 만드는데 충분했다. 신부는 거의 은둔소를 나오는 일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많은 「투아레그」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정주민인 「하라틴」을 제외하면 「호가아르」의 주민도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여자와 어린이들과 노인들의 텐트는 목장을 따라서 산속을 쉴새없이 이동한다. 남자들은 낙타를 「니제르」의 가장 좋은 목장에로 이끌고 가거나 「티디겔트」 혹은 「수단」에 장사하러 가던가 해서 항상 사하라를 돌아다니고 있다.
『「투아레그」인의 생활은 뱃사공의 생활이다. 가정에서 지내는 날은 대단히 드물다』 신부는 기록했다. 「타만라셋트」는 「켈 아하가아르」족이 이동하는데 통과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신부는 많은 방문객들을 가만히 있으면서 만나 보기에 가장 편리한 장소를 택한 것이었다. 10월에 다른 전사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뭇사가 다시 「타만라셋트」에 나타났다. 그는 은둔소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빈약한 풀밭에 낙타를 먹이러 온 것이다.
신부와 「아메노칼」은 서로 빈번히 방문했다. 두사람은 우정으로 맺어지기 시작했다. 샤르르 수사의 첫인상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아메노칼은 대단히 종교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호가아르 중에서 아마 단 한사람 그는 참으로 진심으로 확고한 회교도이다. 그가 이종교적인 열성을 얻은 것은 베이 즉 「아탈리아」에 사는 은자 쿤티와의 교제로 인한 것이다. 베이에 관해서는 좋은 것 밖에는 들은 일이 없으며 그는 외출을 하지 않고 평화와 온건의 사도로서 항복과 강화를 설명하는 이외에는 전연 정치에 관여하는 것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뭇사를 지금같이 만든 것은 그의 충고로 된 것이다.
뭇사는 지금 40세정도 되었으나 젊을때에 공격대의 수령으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이우리민덴」과 「아일」족에 대해서 여러차례 성공적인 원정을 행했다.
베이와 접촉함으로써 그는 공격대를 단념하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이외에는 무력을 해사하지 않고 평화와 기도의 인간이 되었다. 「호가아르」의 인구에 이교도인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가 우선 생각한 것은 자기 재산을 전부 팔아 가지고 「투아레그」인들에 지상의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풀」이나 「맥카」로 가는 것이었다.
베이는 그에게 그 계획을 단념시키고 동포를 구제하기 위하여 힘쓰고 프랑스인과 화목하고 그들을 구하는데 노력하라고 했다. 뭇사의 열성은 그에게 대단히 좋은 일을 하도록 했으나 단지 한가지 불편한 것이 있었다. 즉 베이는 올바른 충고를 하기 위하여 언제나 옆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순진한 뭇사는 그 열성과 무지로 인해서 어떤 은자(隱者)에게나(보통으로 그 은자 등은 대단히 무지하며 우리들에게 대해서 극도로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며 -모든 결점 모든 악덕을 겸하고 있는- 인간중에서 가장 악한 인간이다) 의지하려고 하고 그들의 권고를 충분히 경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지성과 그의 양식은 항상 궁지에서 구해왔다.
프랑스인과 대면하고 있을 때 그는 대단히 훌륭하고 의리가 굳다. 그러나 모든 회교도들과 함께 그는 이 이교도들을 대단히 경멸하고 있다.』
신부는 편지에다 뭇사의 초상을 그릴때 그림자를 감추지는 않았다.
공감과 자애도 그 명성을 제거하지는 않앗다. 그러나 이 신앙심이 깊은 사막의 군주의 얼굴 속에는 확실히 광명이 그림자보다는 우세한 것이 보인다.
『대단히 총명하고 선의에 가득차 있으며 오로지 회교도와 「투아레그」의 행복을 찾고 있는 사나이입니다. 관대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투아레그」의 여러 족속들 간에 평화를 가져오게 하며 강자의 폭력에서 약자를 보호하며 또한 관대성 경건성 친절 용기 등으로 인해서 「인 사라」에서 「통부크트」에 이르기까지 만민의 존경을 획득하는데 그 생애를 바치고 있읍니다.
그가 행한 선행 평화와 정의를 위한 노력은 「호가아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_이트」 「실우여」 「타이토크」 「이우리민테」 같은 인구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퍼져있읍니다. 그의 온건 평화의 정신부정에 데하여 빈한한 사람과 압박당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신념의 견고함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나와 그와의 사이는 긴밀한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숭고한 성질은 야심과 관능주의와 비회교도에 대하여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경멸과 증오를 배척했겠읍니까. 나는 그렇게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공동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 개인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에 선행할 만한 참된 경건심과 그의 두뇌 속에 있는 허위와 악한 것을 선으로 변경시킬만한 지성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뭇사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신부는 외국인이며 그리스도교인이며 라페리느의 친구이다. 그가 삼년전에 대담하게도 「호가아르」의 금지된 지방에 대한 모험을 계획했다면 여지없이 학살되었을 것이다.
아메노칼은 그와 만나고 그와 얘기할 시간이 있었으므로 그안에 천주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일찌기 라페리느가 생각하던 기상천외의 일이 실현되어가고 있었다. 베이는 먼곳에 있고 신부는 가까이 있었으므로 뭇사는 신부를 자기의 심복의 조언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부가 이러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성실성의 가장 훌륭한 증거다. 왜냐하면 신부는 면대해서 자기를 소개하고 「투아레그」인의 눈앞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가아르」의 아메노칼이 라페리느의 친구에게 이러한 신뢰를 주었다는 것은 역시 뭇사의 명애이다.
신부가 「호가아르」에 안정된 이후 2개월이 지난 1905년 10월에는 벌써 아메노칼이 그에게 조언을 구하러 왔다.
신부는 오래동안 기구와 반성을 한 다음에야 비로서 그에게 대답했다. 「투아레그」인과 신부와의 사이에는 겉으로 보이엔 아무런 이상한 점도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편이 무엇인지를 서로 완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생활과 외적생활 신앙생활과 이해문제를 지도하는 방법과를 마음속에서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면 내적인 애매한 점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르르 수사는 결코 그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뭇사와 대화를 하려는 「가련한 흑인들」에게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유일한 계명 즉 천주성의를 찾아내서 그것을 실행하도록 가르치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와 전연 같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노트에 이렇게 이록하였다.
『뭇사는 그의 「아드라아르」의 여행에 대해서 대령에게 말해야 할 것에 관해서 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 예수여 나에게 답변을 가르쳐 주소서 대답을 인도해주소서 「완전하면 할 수록 사람은 공통의 이익을 개인적 이익에 앞세운다」(성 아우구스틴의 회칙) 그러므로 뭇사는 그의 개인적 이익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통의 이익을 구해야 할 것이다.
누구의 이익일까?
우선 첫째로 「켈 아하가아르」의 이익을 둘째는 다른 「임하아르」(다른 투아레그)의 이익을 구해야 할 것이다. 행복은 그것은 천국이다. 천국을 주는 것 그것은 천주의 성의를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신부가 「가련한 흑인들」을 위해서 생각한 이러한 교리문답은 그리스도교의 계시의 모든 내용이 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증주의적 정신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내용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좋으나 그러나 야만적인 영세지원자들에게 영적지도자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며 가장 어리석은 짓이 아니냐. 즉 극단으로 말하면 그것은 정신착란을 일으킨 직업적 기형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분별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미치광이 짓으로 보이는 것도 신적(神的)인 예지 일수가 있는 것이다. 신부의 모든 계획 중에서 이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었다.
아메노칼은 그리스도교도가 아니고 회교도인 것이다. 그리스도교도와 같이 그는 「시나이」산의 천주를 흠숭한다. 지극히 높은 자의 의지,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다. 그와 신부 사이에서 두사람이 함께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 공통된 한 점인 것이다.
신부가 기회있을 때마다 뭇사에게 역설한 것이 바로 이점이다.
즉 천주의 의지를 숭배하고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잘 알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천주의 뜻)을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충실하게 완성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활의 모든 규율이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