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성서학자들의 의덕을 능가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당신 제자들을 권고하십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과 성경학자들의 의덕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순전한 외적 준법을 뜻하고 있읍니다. 즉 「모세법」과 이 법에서 부여된 세첵의 순외적 준수를 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성서학자들은 천주께 대한 경신례나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외적행동만을 치중하였고 외적행동에 윤리적 가치를 주는 내적 심향을 등한시 하였던 것입니다.
예컨데 「파공을 지킴」에 대하여 본다면 「바리새」인들과 성서학자들은 파공날에 어떤 일을 하여서는 아니되고 어떤 일은 할 수 있는지 세칙의 세칙까지 규정하였읍니다. 그러나 무엇때문에 파공을 기켜야 하는지 파공의 본 의의에 대하여서는 별로 생각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이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파공날 병을 고치셧다고 여러번 비난하였읍니다.
저들은 파공만을 생각하였지 천주님의 영광과 다른이에 대한 사랑이나 자아성화(自我聖化)에 대하여서는 별로 개의치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살인치 말라!』고 한 제5 계명에 관하여서도 매한가지였으니 저들은 살인한다는 외적 행동만을 보았지 사람을 죽인다는 끔직한 행동은 저지르게 한 내적 동기에 관해서는 등한시 하였던 것입니다. 타인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고 살인을 유발하게 되는 무소 비방 욕설 저주 원한 악정은 등한히 하였던 것입니다.
제사에 관하여서도 제물이나 예식에 관하여서는 온갖 세칙을 다 알고 있었으나 천주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심은 등한시하였읍니다. 또 저들이 얼마나 외적 행동에만 치중하였는지 저들이 기도나 시사할 때나 재 지킬 때 취한 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읍니다.
기도할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장황한 인사를 큰솔히로 늘어놓았으며 시사할 때에는 회당이나 길거리에서 하였고 나팔을 불어 자기들의 선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곤 하였으며 재를 지킬 때는 용모를 거칠게 하고 얼굴을 찡그려 자기들의 재 지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었던 것입니다. 이때문에 예수께서는 저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교하셨읍니다.
『겉 꾸미는 학자와 바리새인들아 너희게 앙화로다! 너희가 회칠한 무덤과 같으니 밖에로는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나 속에는 솢앙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두 23장 27)
천주의 자녀는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천주님께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자이니만큼 외적 행동을 무시할 수도 없으며 또 무시하여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 행동 그 자체만으로는 윤리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니 우리의 행동이 선한 것이 되기 우하여서는 자유선택을 따르는 내적 재결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재결이 창조적인 사랑에서 이루어지늬냐 혹은 반항과 거부하는 삐뚜러진 심정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는데서 우리의 외적행동은 건설적인 것이 될 수도 있으며 파괴적인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전에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니 우리는 순 외적 준법(外的遵法)으로만 천주의 자녀가 될 수 없읍니다. 예컨데 『주일날 미사에 참예하고 육신을을 파하라는 성교회의 제1규를 지킴에 있어 그것이 순전한 「책무이행」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바리새」적 의덕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며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신공이 「본분이니까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구리나 소리나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법 준수는 천주께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이행되어야 하며 애인덕(愛人德)을 증진시키는 방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崔昌成 神父 (慶北 柒谷본당 주임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