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14) 祈求(기구) ③
발행일1963-02-17 [제363호, 4면]
『미남이를 그렇게 간단히 데려가실 수 있겠어요』
수련이는 피가 끓어올랐다.
『그야 그렇죠. 그러기에 이렇게 만나서 상의를 하는게 아닙니까』
안명철은 밉살맛도록 침착했다.
『어쨌든 그이의 편지라도 있거든 먼저 보여주세요』
이것은 분명 안명철의 오만한 태도에 대한 반반이다. 여러 말 않고 욧점을 켓취하려는 의사표명이다.
『편지는 가지구 왔읍니다만 조건이 맞지 않아서… 드리기 어렵겠읍니다』
『조건이란 무어죠』
『거북합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죠. 요는 미스·김의 생활 상태입니다』
『털어놓고 말씀해 주세요』
『「빠」에 나가시는걸 목격하고 보니 박군에게 부탁받은 제 입장이 몹시 난처하게 됐거든요…』
『아-니 그렇다면 그 이가 언제 나에게 무슨 특별한 약속이라두 허구 갔나요? 그냥 어느 틈에 자취를 감추구 마랐어요. 실컷 내버려두다가 인제와서-』
『그 이유는 아까 말씀 드렸읍니다.』
『서울 바닥에서, 연약한 젊은 여성이 소식도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더우기 아이까지 기르려면 얼마나 고달픈지 아시겠어요.』
『……』
『제가 「빠」에 나간걸 생각이 부족했다구 뉘우친 일도 한 두번이 안야요.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저로선 올바른 직장에는 갈 생각도 못했어요. 기껏해야 급사 아니면 타이피스트. 전화 교환수 정도인걸요. 그 월급 가지고는 도저히 살어가지 못할 사정쯤 이해 하실 거야요. 뿐만 아니라 장차 미남이를 교육시키고 학비도 예비해야 하잖어요』
여기까지 단숨에 말하고 수련이는 울음이 터졌다.
『그걸 아셔야 해요. 자기는 나를 헌신짝같이 버리구 가구…. 지금에 와서 나만 가지구 추궁을 하는건 도리에 맞잖지 않을까요.』
수련이는 수세(守勢)에서 공세(攻勢)로 들어갔다. 여러해 기다리던 일이 지금 이 자리에서 판가름을 하게되고 보니 수련이는 도저히 냉정할 수 없다.
『「빠」에 나간다구 더러운 게집이라고. 자식만 데려 간다니 그게 될 말입니까. 그 이가 그렇게 도량이 좁고, 그렇게 세상을 모를까요. 어느 직장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만 올곧으면- 몸 하나만 깨끗이 가지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한 게 그게 그렇게 잘못이겠어요?』
오명철은 잠시 무안한듯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이따금 연기를 내뿜고 창밖에 __이는 남산을 __기도 했다. 아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것을 궁리하는가 보다.
『잘 알겠읍니다. 물론 박군이 먼저 잘못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이제는 두 분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구보니 아무래두 서로가 그간 밟아온 길을 한 번 되살피게 되는거죠』
『그럼 그인 내가 「빠」에 나가거든 유도 사정도 듣지 말고 무조건 미남이만 데리고 오라구 했나요?』
『그런건 아닙니다. 뭐 반드시 「빠」에 나간다구 트집을 잡으려는건 아니나 좀 곤란합니다』
『맘대루 하세요. 그 대신 미남이는 내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은 나만이 아는 일이니까. 내가 모른다면 그만이겠지요.』
『그건 안 됩니다. 박군은 지금 핏줄이라구는 미남이 하나뿐입니다. 지금 박군은 미남이에게 온갖 희망을 다 걸고 있어요.』
『그래서 내게는 알리지도 않고 나의 행동을 스파이 했군요.』
『아니 스파이라니…….』
『그걸 누가 모를줄 아세요. 스파이가 없으면 어떻게 내 일을 그렇게 자세히 알구 계시죠!. 현저동 내가 사는 집은 어떻게 아셨죠. 미남이가 안양에 있는건 누가 알려드렸죠?.』
『……』
『그래 내 일을 스파이 할 생각은 갖구, 고생하는 날 도와주려는…그런……그런. 따뜻한 마음씨는 조금도 없든가요.』
『그건 나도 모르는 일입니다. 서울에 와서 안 일입니다.』
『내 뒷조사를 한 사람이 누군진 모르지만 그 사람의 무책임한 조사보고만 믿구. 내 변명은 무시할 작정입니까.』
『그건 그렇지 안쵸. 지금 이 자리가 바루 그러자고 마련된게 아닙니까』
『그럼 어서 그 이의 편지를 내노세요.』
『네. 드시죠. 그러나 박군의 부탁은 그렇게 간단치 않아서』
수련이는 몹시 분개했다. 박영진이가 친히 나타난 것두 아니요 심부름 왔다는 거드름피는 사나이 앞에 이 이상 굴욕은 참기 역겨웠다.
『그 이가 무슨 부탁을 해서 그러시는지 자세힌 몰라두 난 더 참을 수 없어요. 어서 실컷 날 염탐해다가 그 이에게 일러바치세요…』
수련이는 벌떡 일어섰다. 「핸드빽」을 드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핸드빽」 손에는 언제부터인가 담겨있는 묵주가 있다. 수련이는 급작스러이 묵주를 꺼내 손에 쥐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다. 그는 문턱까지 가서 주춤하고 섯다.
「핸드빽」을 가슴에 안고 잠시 눈을 감았다. 빌고 싶은 마음이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이 자리에서 이렇게 기막힌 일을 당하구 보니 세상이 온통 차갑기만 하구 오직 「핸드빽」 속에 든 묵주만이 따뜻한듯 느껴졌다.
『미스김, 잠깐만 앉으세요. 이래선 안됩니다. 어서 앉아요』
『앉을테니 이 이상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수련이는 역시 약했다.
미남이에게 아버지가 있다고 해 온 내력만 생각해도 이 기회를 허술하게 지내쳐 보낼 수는 없다. 오직 오명철이의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매시꺼워 탈이다. 마치 비밀저탐의 괴수같이 서두르는 태도가 안이꼬았다.
『실은… 박군이 편지를 두 장 써주며 한 장은 미스김이 깨끗이 기다리구 있을 경우 또 하나는 그렇치 않을 경우 두 가지로 나누어 부탁을 했기 저로서는 부득이 주저를 하는 겁니다.』
『그래 오선생님은 지금의 저를 그 어느쪽이라구 생각하세요』
『그야 미남이와 어머님을 위하여 무한 애쓰고 계시다구 생각하죠』
『그건 말씀이 너무 희미합니다. 애쓴다는 말 가지군 판단이 나질 안쵸』
『잘라서 말하죠. 어제밤엔 놀랬읍니다』
『지금은요…』
『조금씩 달으게 갑니다』
『명동바닥은 비밀이 없는 곳입니다. 수련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당장 아실거야요. 이 자리에서 말막음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어요. 그걸 믿어주세요. 이 자리에서 안선생만 속이면 해결날 일도 아니고 두고두고 저야할 책임인데 어리석은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수련이는 필사적이다. 오명철이를 어떻게든지 설복해야만 했다.
『잘 알았읍니다. 그럼 우선 이걸 먼저 보십시요』
그는 가방을 열더니 큰 봉투를 하나 끄냈다.
『이걸 끄내보세요』
수련이는 곧 속을 뽑았다. 사진이다. 박영진이가 혼자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는 싸인까지 해 있었다.
(어쩌면 미남이와 이렇게 똑같을까)
수련이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옷모양을 보니 부유해 보였다.
『박군의 신임장입니다. 이 사진을 드리면 믿으실 거라구』
사진을 든 수련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오명철은 사진에 떨어지는 눈물을 민망히 바라보면서도 암말 않고 있다.
『지금 박군은 사업에 성공하여 부유하게 지냅니다. 사진에 나타난 것 같이 아직 독신입니다. 미스김과 미남이를 생각하며 살아온 사나이올시다』
『저는 안 그런가요… 저두 마찬가지야요』
수련이는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너무해요… 내게 무얼 잘못했다구 뒤를 캐구 「스파이」를 내세우구』
『하…하… 그건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무조건 다시 만난다는 것은 숫제 뒤가 개운하지 못하지 않겠어요』
듣고보니 그럴상도 싶었다. 자기의 몸이 결백함을 믿고 있는 수련인지라 그 이상 노여움은 갖지 않으려 했다.
『그럼 어서 편지를 주세요』
『드리죠』
『어느 쪽 편지를 주시겠어요』
『하…하… 받아보시면 알께 아닙니까』
오명철은 여전히 거드름을 피며 또 가방을 열었다. 이 사나이의 거드름은 타구난 습성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