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42) 미셀 수사가 본 것 ①
발행일1962-07-22 [제336호, 4면]
「베니 아베스」가 가까워지자 신부는 옛고향에 돌아온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토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것은 나의 위로가 되었으며 오래간만에 왔건만 그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으며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라는 것은 그들이 말하듯이 하나의 「마라부트」 즉 그리스도교이 수도자인 것이다. 거기서부터 회심하기까지의 길은 지극히 요원하다…』
그때 사태각 급변했다. 샤르르 수사는 이미 여러해 동안이나 「작은형제수도회」를 위해서 회칙을 만들고 공허에다 호소했을뿐 아무런 응답도 얻지못했던 것이다. 후보자가 혹간 있어도 그 초안을 검토하고 나서는 출발을 앞두고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젊은 브르똥인으로서 그 전교황령(敎皇領) 병사였던 백의회 선교회의 조수사(助修士) 미셀 수사가 그를 따라서 「호가아르」에 가겠다고 신청해왔다. 게랑 주교는 초안에 찬성했다. 그는 신부가 신가입자를 잘 다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쁨에 넘쳐서 샤르르 수사와 미셀 수사는 12월 10일 「알제에」를 출발했다. 그들은새로운 종점이 된 「콜롬보 베샤르」까지 기차로 갔다. 그곳에서부터 「베니 아베스」까지의 길을 가야했다.
신부는 낙타를 두마리 샀다. 미셀 수사는 신부가 그 이상 낙타를 더 사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거의 1년6개월이나 여행을 햇으니 걸어가지 말고 타고가기 위해서 그에게 낙타를 한마리 더 사라고 권고했다. 그는 완강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가족들의 부담으로 살고 있으며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비용을 지출할 권리는 없읍니다. 우리들은 식량품과 짐을 운반하는데 필요한 낙타가 두필 있으니 또 한필은 필요없을 것입니다.』
샤르르 드 후꼬오는 이제는 재산고 없으며(군대의) 봉급도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의 유일한 「비밀자금」은 누이동생과 종자매가 보내는 희사와 사관친구들이 여러차례 보내준 선물이었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없이 생활하고 나머지는 사하라의 불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토민들의 신뢰를 얻게된 것도 이 빈곤한 생활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그리스도교신자라 할지라도 이 청빈이 그가 천주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증하였다.
그는 그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셀 수사가 도착하게된 것은 신부가 그때까지 그럭저럭 살아오던 최저에 산을 대단히 혼란시켰다. 그는 낙타를 보충해서 사들일 결심은 하지 않았으나 미셀 수사를 위해서 말 혹은 나귀를 세를 주고 빌렸다.
『…삼일간 보행한 뒤에 우리들은 아무런 곤란도 없이 신부가 전에 최초의 은둔소라고 하는 것을 설립한 「베니 아베스」에 도착하였으며 그 은둔소에서 수일간 휴식을 하게되었다. 그것도 그 지방의 모든 오두막집들과 같이 나무와 흙으로 만든 대단히 질박한 수도원이었다 … 미래의 수도자들을 위한 7,8개의 수도자 독방은 천정이 대단히 얕으므로 보통키의 사람이라도 손을 들면 천정에 손이 닿고 옆으로 손을 뻘리면 좌우의 벽에 협잡한 것이다. 거기에는 침상도 좌석도 책상도 장궤틀도 없다. 흙바닥에 편 종려로 만든 거적 한장 위에 옷을 입은 채로 자는 것이다. 성물실은 제법 컸으며 신부는 그곳을 도서실 겸 창고, 침실 겸 일하는 방으로 이용했다. 성당은 딴 건물과 같이 나무와 흙벽으로 만든 것이며 그 위에는 작은 종루가 세워져있다.』
『우리들은 크리스마스를 그 은둔소에서 맞이했다. 자시 미사에는 백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가 사관 하사관 사병들이며 성당뿐 아니라 성물실까지 가득찻다. 나는 이 많이 모인 사람들 중에 한사람의 여성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혼혈의 노파였으며 극히 가난하고 완전한 장님이었으나 그 우아한 육체에는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여있었다. 신부는 그에게 3·4년전에 영세를 시키고 자기에게 보내오는 선물로 그를 양육해왔던 것이다.
그 여인은 그날 그날을 기도로 보냈으며 「베니 아베스」에서 미사성제가 있을때마다 영성체를 했다. 자기의 은인이 출발하게 되자 그 여인은 극도로 슬퍼서 소리를 높여가며 통곡하기까지 했다.』
외따로 떨어진 이 오두막집에서 우리가 10일간 지내는 동안에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규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람푸가 없는데다 밀과 밀초는 가끔 행하는 긴 예절을 위해서 절약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기침과 취침은 태양을 따라서 해야했다.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신부였기 때문에 친히 솔선해서 힘드는 규율계라는 일을 맡아 보았다. 이러한 일은 보통으로 다른 수도단체에서는 가장 연소하고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는 밤이 새면 나를 깨우러 오는 것이었다. 옷은 입은채로 자기때문에 정돈하기가 손쉬웠으며 기침한지 몇분 후면 종소리에 맞추어서 삼종경을 외우고 성당으로 갔다.
나의 원장은 그때 라띤어와 프랑스어 반반으로 된 긴 기구문을 외웠으며 나는 그것에 응답을 했다. 그는 「딴뚬에르고」의 성가와 더불어 성체를 현시해놓고 미사를 시작하고 나는 복사를 했다.
나는 미사중에 영성체를 한다. 그리고 나서 두시간 이상 침묵과 조배가 계속된다. (신부는 7시에 미센 수사에게 차와 빵조각을 주었다.)
9시경에 우리는 각각 자기일은 하러간다. 즉 원장은 그 책과 원고가 있는 성물실에 들어 박혀서 편지도 쓰고 「투아레그」 사전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는 책상도 없이 궤짝 위에서 글씨를 썼다. 나는 그동안에 독방에 들어가 있는다. 거기는 일터인 동시에 부엌이고 식당이었다.
화로같은 것이 거기에 있다. 나는 여기서 영적인 독서를 하거나 또는 이 지방 사람들이 하듯이 멧돌에다 보리를 갈거나 방망이로 절구에 담겨있는 야자열매를 짓찧거나 빵을 만들거나 혹은 반찬을 장만하거나 하는 것이었다.』
『11시에 신약성서 한편을 읽고 특별 성찰을 한 후에 식사를 시작한다. 식사전의 신공을 외운다음 신부는 일어서서 높은 소리로 「준주성범」의 2·3절을 읽는다. 이렇게 한다음 우리들 즉 신부와 흑인 하인과 나는 불에서 흙바닥에 내려놓은 냄비를 둘러싸고 거적 위에 앉아서 한마디도 말은 없이 한그릇에 담긴 음식을 스푼으로 떠다가 식사를 하고 주전자에 떠온 물을 마신다. 음식물은 대개 변화가 없었다. 즉 쌀밥 혹간 가다 분유로 지진 쌀밥 한접시 그 속에는 때때로 사막에서 자란 당근이나 무가 들어있다. 혹은 밀가루와 야자열매 다진 것과 물을 섞어서 만든 제법 맛있는 「마르므라아드」같은 것이었다. 이 미소한 식량을 섭취하는데 식탁보 나프킨 접시 나이프 포오크 같은 것은 없다. 15분이나 20분후에는 일어서서 식후 신공을 외웠다. 그리고 두사람은 시편 「미세레레」를 노래하면서 성체조배와 영적독서를 같이 하기 위해서 성당으로 간다. 2시경에 우리들은 각각 자기일을 시작한다. 신부는 연구를 하고 나는 손노동을 한다.』
이러한 규칙 밑에서 일주일을 지낸 후에 신부는 또다시 출발한다는 것을 표시했다. 그는 「투아레그」인을 만나서 그들을 따라서 자기의 어학연구를 다시 시작하기를 서두루고 있다. 두 사람의 수도자는 「아드라아르」로 향했다. 「베니 아베스」의 사관들이 첫날의 여정을 호위했다.
『다음날 아침 사관들은 정답게 인사를 하고 떠나버렸다. 토민병 두사람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남았다. 신부는 작별할 때 「베니 아베스」의 열쇠를 대장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주의 집(은둔소)을 잘 지켜주시요 부탁합니다.」 이 사막을 횡단하는 동안 마침 겨울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15도 내지 20도엿으나 밤이되면 영하 2·3도까지 내려갔다. 우리는 아침에 몇번이나 병에 물이 얼고 땅이 얼어서 부풀어 오른 것을 목격했다. 때때로 강한 바람이 불어서 사진(砂塵)이 충천하고 눈에는 모래가 들어가고 얼굴에는 돌부스러기가 날라왔다. 저녁때 마을에 도착하면 어떤 마을에서나 우리를 환영하고 집 속에 하루밤을 재워주었다. 그러나 대개는 별이 반짝이는 벌판에서 불도없이 자기 손으로 겨우 몸이 들어갈 정도의 모래굴을 파고 그 속에서 잠을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