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성지순례)] (4) 「無山千里(무산천리)」 오늘도 肥沃(비옥)
傳說은 年年歲歲 꼬리 낳고
발행일1963-02-24 [제364호, 3면]
이 정권 때부터 음력과 세에 대해 당국은 해마다 민간풍속을 간섭하는 태도의 발언을 했고 신문지상에서 많이 왈가왈부했다. 언론이, 교육이, 점잔은 태도로 올바른 이론을 들어 순순히 백성을 깨우치고 지도해 나가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천년 선래의 풍습을, 그것도 조석의 제기를 모시는 아름다운 풍습을, 무슨 큰 잘못이나 저지른 것을 다루듯이 비난과 공격조로 나온다면 일반 대중의 반발만 살 뿐 효력은 없는 법이다.
더우기 정부 당국에서 백성을 위해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마땅히 해결하고 시행해야 할 큰 문제에는 아무런 성의를 기울이는 표시가 없으면서 그다지 시급하지도 않는 그러나 조선(祖先) 전래의 인습에 굳어진 과세(過歲) 문제로 가장 현명한 선각자가 가장 긴급한 일을 명령하는 것처럼 백성에게 임하였으니 백성들은 속으로 『그 비싼 국록을 먹고 앉았는 작자들이 제 할 일 무엇 하나 잘해 놓았다고 약한 백성들만 못살게 들볶는 것이냐?.
제가 해야 할 일이나 똑똑히 잘 하라지』라고 코웃음만 친 것이 아니었떠냐? 풍습이란 일조일석에 뜯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납할 수 없는 풍습이 아닌 바에야 고칠 수 있는 분위기부터 조성해 놓고, 서서히 고쳐지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상의 말은 비단 위정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소위 남을 지도한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고싶은 말이다.
이날은 좀 늦게 숙소에 돌아와 쉬고 익일 「베타니아」로 차를 몰았다. 「베타니아」라면 나자로와 말다와 막달레나가 살던 집터가 있다. 그곳에도 가톨릭의 경당(敬堂)을 세웠는데 대리석의 질은 좋지 못하다. 지붕 밑에 창을 넉넉히 내어놓았기 때문에 밝고 깨끗하다. 「모자익」으로 된 그림도 있으나 「로마」것에 비해 소박하다. 「비산띤」 시대에 세웠던 성당 바닥의 「모사익」의 편인(片麟)이 남아 있는데 널판으로 가리워두고 순례자들이 오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편인만 보아도 그 옛날 회회교도들이 처들어와 만적(蠻的) 파괴를 하기 전의 성전은 얼마나 크고 아름다웠던가를 무언으로 증거해주는 것 같다. 이런 것을 보고 또 당한 가톨릭이 더구나 다혈질인 구주인들이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을 아니 일으키고 견디어낼 수는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나자로의 집터에서 얼마 멀지 않는 곳에 나자로의 무덤터가 있었다. 역시 촛불을 켜들고 지하로 상당히 깊이 내려갔다. 토질은 토마의 「까다곰바」의 그것과 같다. 「까다 곰바」는 공동묘지요 나자로의 무덤은 독무덤인 것이 틀릴 뿐이다.
그러니 옛날, 사람 묻는 방식은 로마인이나 유데인이나 같았던 모양이다. 바람은 불고 땅은 몹시 토박하다.
사람들은 땅굴을 몇층씩 파놓고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지붕은 지상에 출입구와 더불어 나지막 나지막하게 보인다. 이처럼 토박한 땅에 그래도 뿌리를 박고 사라가는 인간들의 생활력의 강인성에 놀랐다. 문자 그대로 무산천리(無山千里)인 기름진 땅, 북구일대와 비교해 볼 때 『구라파인들은 남이 못 가지는 머리를 두 개씩이나 가지고, 손발을 네 개씩이나 가졌기 때문에 부요하게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자연 조건이 잘 살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다.』라고 자유구라파 일대를 여행하면서 느겼던 것이 문득 다시 느꼈진다.
「베타니아」에서 떠나 「벹파네」로 왔다. 「벹파제」는 예수께서 나자로를 부활시키고 「예루살렘」에로 돌아오실 때 나귀를 타신 곳이다.
거기도 역시 조그마한 경당이 있었다. 벽에는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가시는 그림이 걸려있고 「호산나」를 부르는 무리들의 그림도 걸려있다. 깨끗하다. 하나 무서운 것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실 때 발디딤돌로 쓰셨다는 바위가 있는데 그곳 나귀들의 키보다 오히려 높아 보였다. 따라서 그 바위에 오르실려면 나귀 등에 오르시는 것보다 더욱 힘드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