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15)黑(흑)과 白(백) ①
발행일1963-02-24 [제364호, 4면]
안명철은 무슨 판결 언도장이나 내놓듯 한 장의 봉투를 내놓았다. 수련이는 가슴이 떨렸다. 잠깐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정하였다. 비는 마음이다.
(어느 쪽일까.)
몹시 궁금하면서도 얼른 봉투를 뜯어볼 용기가 나지를 않는다.
『어서 뜯어보세요』
안명철은 여전히 밉살맞게 군다. 마치 초조해 하는 수련이의 모습을 바라보려는 차가운 태도다.
(이 사람이 명색이 무엇이기 이렇듯 짓궂게 구는가. 미남이 아버지의 친구라면 친구의 아내에게 이렇게 할 수가 있는가)
수련이는 몹시 적의를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길한 예감 뿐이다. 행실이 어지러웠다는 선고가 나릴 것만 같았다.
(내가 왜 「빠」에는 나갔을까…)
지금에 후회한들 이미 때는 늦었다. 진영이가 아무리 꼬이더라도 듣지 않았떠면 이런 경우는 당하지 않았으리라. 눈앞에 말없이 놓인 봉투가 마치 검찰관같이 서먹했다.
『어서 뜯어보세요』
안명철은 또 한 번 곁눈을 떳다. 조금 전에 경찰서에서 느끼던 불안이 가슴에서 되살아났다. 수련이는 봉투를 집어 피봉을 찢었다. 알맹이는 편지 한 장이었다.
수련씨.
오랫동안 소식을 끊어 불신한 잘못을 사과합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너그러이 풀어주시요.
부탁드리는 바는 아들 아이를 내게로 보내 달라는 것이요. 물론 그동안 아이를 기른 수고는 성의껏 갚으리다. 우리나라 법은 아이는 아버지에게 딸리기로 돼 있는 줄 알고 계실것이기 여러 말씀 덧붙이지 않습니다.
아이 이름을 미남(美男)이라고 지었다고 들었으나 내 집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항렬(行列)자가 있으니 이름은 고쳐야 할 것입니다.
미남이의 양육비는 이 편지를 가지고 간 안명철씨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리 아시고,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정을 부디 북돋아 주시요.』
수련이는 편지를 손에 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곰짝을 하지 않는게 아니라 편지를 두 번, 세 번 거듭 읽느라고 시간이 걸렸다.
안명철은 입을 다물고 수련이의 눈치만 보고 있다. 고요한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숨막힐 지경이다.
『편지의 뜻을 아시겠읍니까.』
안명철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높은 자세이다. 수련이는 대답 대신 눈물을 흘렸다.
『미남이는 내 아들입니다. 박영진이의 아들이 아닙니다.』
수련이는 소리치듯 항변했다.
『아니 어머니의 아들이 어디 있어요. 아들은 아버지한테 매이는게 법입니다.』
『아니 어떻게 미남이가 박영진이 아들됩니까. 박영진이가 언제 아버지 노릇을 한 적이 있어요. 그 아이는 내가 혼자 낳아서 혼자 기른 나 혼자의 아들입니다. 아무도 그 아이를 뺏아갈 권리는 없어요. 법이 그렇다고 주장하시거던 법대로 하세요.』
수련이는 벌떡 일어섰다. 당장에 안명철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격분이 터진 것이었다.
『난 가겠어요.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도 마시고 내 행동을 스파이 하지도 말아요. 지나친 행동은 삼가야 해요』
수련이는 곧장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미스 김! 참어요. 어서 이리와 앉으세요…』
안명철은 아까와는 달리 몹시 당황했다.
『놔요. 이 옷자락 놔요.』
『글쎄 내 말 한 마디만 더 듣고 가세요. 꼭 한 마디만…』
형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안명철은 기어코 수련이를 밀어다가 자리에 앉혔다.
『온 성미두 너무 대단하셔』
마치 가면을 벗고 나선 사람같이 안명철의 태도는 사뭇 부드러워졌다.
(이 사나이가 괜스레 사람의 속을 떠보려고 허세(虛勢)를 부렸구나…)
수련이는 즉각 깨달았다.
『글쎄 무슨 더 할 말이 있어요. 이야기는 이미 끝났지 않았어요』
『글쎄 이런 일이 한 마디로 끝장을 볼 수 있겠어요』
안명철은 숫제 반문을 했다. 수련이는 일어서 나갈 때와는 달리 숫제 잘됐다구 생각했다. 만일에 이대로 담판이 깨지고 보면 손해를 입는 것은 수련이인 까닭이다.
『내가 「빠」에 나간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미남이는 안양에 두고 나만 몰래 나갔어요. 「빠」에 나가는 계집은 모조리 타락했다고 보실지도 모르나 그것은 그 당자만이 아는 일이지 일률적으로 다 그렇다고 단정은 못하십니다. 지금에 와서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고 미남이만 내놓라는 태도는 너무나 냉혹합니다.
소식도 없이 여러해 내던져두다가 이제야 찾아와서 잘잘못을 가리려는 태도는 정말 너무해요.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면 누가 그걸 받아요』
『잘 알겠읍니다. 저는 중간에서 심부름을 하는 입장이라서… 말하자면 박군의 대리인인지라 자연 일방적으로 말이 지나쳤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잘 이해 하셔야지 어쩝니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그걸 일러주세요』
『하…하… 미스김! 아니 미세스·박이시지. 미남이 어머님이라 부르는게 더 좋겠군.』
『어서 말씀이나 하세요』
두 사이의 분위기가 사묻 부드러워졌다. 안명철이가 수그러진 까닭이다. 생각컨대 안명철은 일단 수련이를 다루어보려고 일부러 거만하고 무뚝뚝한 태도를 지었는지도 모른다.
『여기 또 한 장의 편지가 있읍니다. 이 편지는 미세스·박의 모든 정세를 옳게 파악하고 나서 박영진군이 부인으로 맞아갈 수 있다는 판단이 내릴 때 비로소 내놓으라는 조건이 붙어있읍니다.』
수련이는 비로소 막혔던 숨통에서 생기가 도는듯 했다. 그러면 그렇지 박영진이가 그렇게 몹쓸 짓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안명철이는 생각던 바와는 반대로 이런 일에 대변인으로 나서기에는 아직도 미숙한 인물이라는 판단이 내렸다.
(괜히 우쭐해가지고 사람의 가슴만 아프게 해!)
수련이는 안명철을 밉쌀머리스럽게 흘겨봤다. 안명철은 수련이의 눈쌀을 느끼자 움찔했다.
『어서 그 또 한 장의 편지라는걸 내놓으세요. 괜히 남의 가슴 너무 아프게 하지 마시고 어서 탁 털어놓고 이야기 해주세요. 수련이에게 속는셈치고 저를 전폭적으로 믿어주세요. 안선생님한테 원망이 돌아갈리는 없으니 그걸 믿어주세요. 수련이는 그렇게 썩지는 않았어요. 안선생님 그래 전 못믿으시겠어요』
수련이는 부드럽게 미소를 띄워가며 안명철이를 반격하였다.
만나자 마자 거북하게 나오던 안명철이의 속셈을 뚫고 본 수련이는 이미 안명철이를 잡아쥔 셈이다.
『허 이것은 까딱하다가는 미세스 박헌태 두고 두고 원망듣겠고. 만일에 미스김이 나를 속인다면 그때가선 또 다정한 친구에게 책망을 듣겠고. 기세 양난입니다.』
『글쎄 저를 믿으세요. 자… 제가 어떠한 일을 하고있는지 증거를 하나 보여드릴까요.』
『아니 증거라니…』
『저의 마음씨를 아실만한 증거가 있어요. 이걸 보시면 짐작이 가실거야요』
수련이는 핸드빽을 열었다. 빽 속에는 묵주가 들어있다. 수련이는 묵주를 무슨 소중한 귀물같이 공손이 꺼내서 손바닥에 들었다. 묵주에서 오는 촉각이 수련이의 가슴까지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자! 이걸 보세요』
수련이는 묵주가 놓인 손바닥을 안명처리의 눈앞에 들이댔다.
『아니 이건 천주교 묵주가 아닙니까…』
『……』
『그럼 천주교에 입교를 하셨나요』
『……』
수련이는 대답할 말이 없다. 영세도 받은 일이 없거늘 무슨 말을 함부로 하랴. 그러나 안명철은 몹시 감명이 컸나 보다. 그는 부랴부랴 또 한 장의 편지를 수련이 앞에 내놓았다.
『그럼 이 편지를 뜯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