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43) 미셀 수사가 본 것 ②
발행일1962-08-05 [제337호, 4면]
캠프용의 침구로 몸을 감고 거적위에서 추위에 떨면서 웅크리고 아침까지 둥글둥글 했다. 어떻게든지 몸을 녹여서 잠을 들려해도 되지않았다. 정오경에 우리는 약간 휴식을 하고 불을 피워서 음식을 마련해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는 해지기 직전에 캠프할 예정지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하루에 두번 먹는 이 식사의 내용은 은둔소에 있을 때와 같은 것이었으며 다만 거피 한잔이 더 있을 뿐이었다. 어느날 신부는 장난삼아 사관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사관들은 이것을 응락했으나 식사하는 동안 대단히 곤란한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먹기는 하였으나 다시는 이런 초대를 받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수일전에 「코롬브 베샤아르」에서 하인을 고용한 흑인노예도 이런 식사에는 기가 막혀서 갑자기 다른 주인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은 2월에 「인사라」에 도착했다.
미셀 수사는 이 여행에서 제법 피로했다.
그는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 샤르르 수사는 되도록 미셀 수사를 돌보아주었으나 그 청녀는 그길의 일부분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대단히 곤란했다. 그러므로 샤르르 수사는 그를 오아시스에서 휴식시켰다.
한편으로 신부는 금전문제로 대단히 걱정했다. 왜냐하면 미셀 수사를 위해서 낙타를 사들이고 지기들이 「인사라」에서 체류하기 위하여 오두막집을 사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다시 종자매 마리에게 사정을 고백했다.
『아무리 해도 여정의 대두분을 미셀 수사를 태우고 가야하기 때문에 새로 낙타를 살 필요가 생겼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을 사는 것과 합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위해서는 충분하지만(그당시 사하라 사막에는 민간우편이라고는 전연 없었으므로 통신이나 수표를 전하는 것은 부속지의 사무소에 의존하고 있었다) 「호가아르」에서 부속지의 장관이 나를 위해서 운반을 해주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게 약간의 돈이 있는 것이 편리합니다. 또 당신이 나를 위해서 그에게 2백프랑을 보내준다면 당신은 나에게 대단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미셀의 건강은 양호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그는 또다시 편지를 써보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수일전에 「인사라」의 부속지 장관에게 2백프랑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또다시 2백프랑을 그에게 보내주기를 바랍니다.
집을 사서 수리하는 비용(약2백프랑) 새로 낙타를 사는 비용(2백50프랑) 「호가아르」에서 6개월 지내는데 필요한 식량 이제부터 4일간 나와 함께 「투아레그」어 사전을 만드는 일을 하는 벤 메시스에게 백프랑, 미셀이 불건강 때문에 필요한 제법만은 비용… 이러한 것으로 해서 내 주머니는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번만 당신의 자비심에 의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미셀 수사를 위해 취한 이러한 심노는 허사가 되었다. 그는 병석에 누워야 했던 것이다. 오아시스에 있는 군의의 진단에 의하면 그는 적리에 결렸으며 「호가아르」에 동행하는 것을 그 군의는 중지시켰다. 그 청년은 대단히 낙담했으며 신부는 더욱더했다. 신부는 처음으로 한사람의 청년을 사막에 데리고 가려했으나 허사가 된 것이다. 신부는 하는 수 없이 미셀 수사를 백의선교회의 신부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엘 고래야」로 돌려보내기를 결정했다.
『마음이 착한 신부는 나에게 제법 많은 금전과 많은 식량을 주어서 내가 신뢰할만한 남자 두사람에게 나를 부탁했다…』고 미셀수사는 말하고 있다.
미셀 수사는1906년 12월 2일부터 1907년 3월 10일까지 약3개월간을 신부의 신변에서 지냈다. 그는 신부를 항상 칭찬했다. 그가 샤르르 수사에게서 찾아낸 유일한 결점은 때때로 사태가 자기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신경질이 되기 쉬웠다는 것인데 즉시 그것은 참을 수가 있었다. 이 실패한 제자이외에는 아무도 이 신부의 기구와 그의 겸양과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에 합당한 모습을 가진 그의 정신적 광휘를 더 잘 묘사한 사람은 없다.
『그는 거의 일주야의 대부분을 조배하고 간청하고 감사하고 사죄하면서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지냈다. 그리스마스날 저녁에는 일순간도 성당을 떠나지 않고 지냈으므로 나는 그다음날 어떻게 해서 당신은 그런 어둠 속에서 자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동안 지낼 수가 있느냐고 대담하게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정의의 태양이며 세상을 비치는 빛인 천주께 얘기하는데 눈이 밝게 보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는 진심으로 모든 은혜 중에서 가장 큰 은혜로서 순교가 자기에게 주어지기를 바라고 간청했다.』
『이 육군사관학교의 졸업생은 인간중에서 가장 겸허한 인간이었다. 나는 그가 자기의 일을 말하기 좋은대로 말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일은 없다. 그러므로 그의 가정과 그의 과거의 성공 같은 것을 알기위해서는 그에게 물어보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는 일부러 미묘하게 보이게 함으로써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웃음거리가 되고 치욕을 받는 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그는 언제나 얼어서 갈라진 맨발에다 형편없는 싼달을 신고 다녔다. 또 새베옷을 입었으나 그것도 항상 작고 헐어빠진 것이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머리와 수염을 깎았다. 그에 대하여 누가 뭐라고 하던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천주의 뜻에만 합당하면 사람들의 판단을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가 어떤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이런 일은 매일 혹은 하루에 두번도 있었는데 위대한 수도자 성인과 같은 모습에 대한 평판을 듣고 추장을 비롯해서 많은 주민들이 그를 만나보려고 찾아와서 그를 보고 그의 말을 들으려고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은 신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시디이마라부우트라는 존칭을 불으면서 그의 손에다 입을 댓다.
또 많은 걸인들이 모여들어서 자기들이 은인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에게 구걸을 하려고 모여들었다. 신부는 그들에게 잔돈으로 15프랑 혹은 20프랑의 돈을 나누어 주었다. 누더기를 입고 거의 나체에 가까운 사람에게는 옷을 해입으라고 옷감을 주었다…』
『사막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낮잠을 자거나 쉬는 대신에 아무리 하루종일 걸어서 극도로 피로했다 하더라도 그는 「장내의 선교사들」의 노력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자기가 죽기전에 완성하려고 하는 사전 만드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가 은둔소에서도 울타리나 들 주변을 산책하고 있는 모습을 본 일은 한번도 없다. 그는 휴식을 하는 일이 없었다.
「투아레그」의 작은 사전편찬을 끝마친 신부는 3월 18일 「통부크투」로 향하는 「아르노 콜티」에 파견단과 함께 「인시라」를 떠났다.
이 일행의 안내자는 셀나크라고 하는 흑인이었으며 그는 뭇사에 의해 파견된 사람이었다. 사관들은 이 사나이가 우둔하다고 생각햇으나 신부는 여러사람에게 이 사람은 투아레그어의 시(詩)를 대단히 잘 외우고 있다고 칭찬했다. 사실에 있어 신부는 시 한줄에 대해서 1「수우」를 셀마아크에게 지불했기 때문에 그는 생각해 내려고 열중하였다. 그는 걸어가면서 「투아레그」어의 시를 읊었고 신부는 쉬지도 않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미셀 수사는 이미 없었으나 콜티에 중위가 이 여행중에 신부의 놀라운 행적을 증언하고 있다. 폭풍이 분 밤에도 샤르르 수사는 텐트민테 웅크리고 앉아 일을 계속했다. 그때 신부는 또다시 포올 암바레크를 고용했는데 콜티에는 이 요리인이 냄비를 깨끗이 하는 방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가 물건을 청결이 하는 방법은 참으로 기묘하다. 어떠한 물건이든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세단게를 경과하는 것이다. 1, 물건을 자기 내의로 닦는다. 2, 그래도 붙어있는 모래를 떽 위해서 손가락으로 닦는다. 3,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먼지를 닦기 위해서 더욱 힘주어 닦는다.』
뭇사를 다시 만난 「티트」에서 약간 휴식을 한 후에 일행은 「타이토크」족이 있는 곳곳을 통과하는 수단의 친절한 사관들을 만나서 신부는 또다시 「타만라셋트」로 갔다.
10개월간을 여행한 다음 1907년 7월 6일 신부는 또다시 홀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