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16) 黑(흑)과 白(백) ②
발행일1963-03-03 [제365호, 4면]
편지 봉투나 필적은 먼젓것이나 똑같았다. 단지 약간 두께가 두툼했다. 두툼한 그만큼 행운이 들어있는가 싶었다.
『어서 뜯어보세요』 안명철은 정중히 권한다. 이 사나이도 천주교를 믿는가? 그래서 묵주는 소중이 알고 신자(信者)의 본분(本分)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수련이는 하나의 과오를 범한 셈이다. 방사도 받지 않은 묵주라면 시중에서 얼마든지 누구에게든지 파는 상품(商品)에 지나지 않는다. 묵주의 성(聖)스러운 가치는 성직자에게 방사를 받으며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련이 손에 담겨있는 묵주는 그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거리와 똑같은 수련이의 기호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태도가 달라진 안명철이 앞에서 수련이가 기가 질린 것은 숫제 당연하다. (나는 천주교를 믿고 있지는 안아요)
한 마디 해야 할 단계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때라두 천주교에 입교를 하려고 마음을 가다듬으려구 우선 이걸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 정도의 해명은 있어야 할 단계이다. 그러나 수련이는 그렇게까지 밝힐만한 용기를 갖고 있지 않다. 우선 행운의 편지를 뜯어 볼 욕심이다.
수련이는 편지를 집어들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 손에 든 묵주를 꼭 쥐었다.
(성모님이시여! 너그러이 허락하소서. 반드시 입교하오리다.)
봉투를 뜯고보니 기다란 편지가 나왔다.
『수련씨! 아니 미남이 엄마!
우선 무신한 나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오. 또 용서해주리라 믿고 이 편지를 씁니다.
지난 일은 만나보구 얘기하기로 합시다. 우선 알려야 할 것은 나는 여전히 당신의 남편이요. 미남이의 아버지라는 것이오. 그 때와 달라진 것은 연륜이 더했을뿐이지 마음의 변동은 없다는 것이오.
나는 그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지내는 형편을 조사해보았오. 분개할지도 모르나 나로서는 의당 해야할 일이 있었고 당신 역시 개운할 것이오.
들리는 소문만 가지고는 또 믿업지 못하여 친구의 수고를 빌어 결정을 내리려 하는 것이오. 이 편지를 가지고 간 안명철군은 나의 친구요. 사업의 협조자이오.
만일에 안군이 이 편지를 당신에게 전하거든 당신은 과거 여러햇 동안 사고없이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판정이 내린 것으로 아시오』
편지를 여기까지 읽다가 수련이는 왈칵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기는 무얼 잘 했다구 나를 「스파이」하는 거야. 무슨 뒷조사냐 말야)
아니꼬운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합격되었다는 기쁨은 감출 수 없다. 인제는 미남이에게 아버지를 보여주게 되었다는 시원한 기분이 가슴에서 부풀었다.
『다 읽으셨읍니까』
안명철은 조급하게 물었다.
『좀 남았읍니다』
『어서 읽으세요. 그 편지를 읽구 나시면 또 드릴 것이 있읍니다.』
수련이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홍콩」에서 독신으로 지내고 있오. 서울에서 떠나올 때와는 달리 뜻밖에 사업에 성공하여 미남이의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할만 하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서울로 가느냐 당신이 미남이를 데리구 「홍콩」으로 오느냐 두 가지 중의 하나요.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정하는대루 따르려하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원한다면 안양에다가 큰농장을 갖고 과수원과 목장을 겸해볼 생각이 있는것이오. 그 이유의 하나는 내 건강이 좋지 않아서 도시에서 돈을 벌려고 몸을 시달리기가 고달퍼서 그러는 것이오.
이 점 잘 생각해서 곧 전화를 걸어 주시요. 안명철군에게 부탁하면 「홍콩」 우리 집에 전화가 통할 것이오.』
「홍콩」이 먼 줄 알았더니 전화만 걸면 음성을 들을 수 있다니 수련이는 마치 꿈만 같았다. 이렇게 쉽게 아는 걸- 그렇듯 오래동안 안타깝게 지내왔구나 했다. 편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신의 지내는 형편만 조사하구 따지는 나의 태도를 몹시 역겨워하리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다는 것은 곧 만나는대루 밝일 것이니 참아두시오. 그러면 당신의 음성을 듣기를 고대하며 만사는 안명철군에게 일임했으니 잘 상의해 주시오.』
『어떻습니가. 마음이 후련하십니까』
안명철의 의기양양한 질문에 수련이는 편지를 든 채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쌓이구 쌓였던 설움이다.
가슴 속에 용솟음치던 격분이 눈물을 타고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안명철은 음성을 낮추어 수련이를 위로한다.
『의당 우실 것입니다. 잠시 고정하시구 제 말을 들어주십시요』
『어서 말씀하세요』
『첫째 오늘부터 그 「남녕·빠」에는 나가지 마십시요』
『네…』
수련이도 이제는 안명철의 의견대로 움직여야 했다. 그것이 곧 행운을 찾는 길인 까닭이다.
『만일에 「빠」 주인에게 갚아야 할 돈이 있으시거든…』
『아- 아닙니다. 그런건 없어요. 그냥 안 나가면 그 뿐입니다』
『그리고 영천집도 철수하십시요』
『네!』
이제는 마치 선생님 앞에선 소녀같이 안명철이 말을 근청할 뿐이다.
『당장 필요하신 비용은 제가 드릴 것이니 우선 신변을 정리하시고 안정을 얻으십시요』
『네!』
『「홍콩」으로 가실 것이닞 이곳에 계실 것인지 그것이 결정될 동안 우선 자그마한 주택이라두 한 채 사서 미남이를 서울로 불러올리십시요』
『미남이에게는 안양이 좋습니다. 외할머님이 잘 돌봐 주십니다』
『글쎄올시다. 안양이 좋다시면 그냥 안양에 계셔도 좋겠죠』
『어쨌든 만사는 미남이 아버지와 전화가 통하거든 직접 상의하고 싶어요』
『하하하 그 심중 짐작이 갑니다. 그러면… 우선 이것…』
하며 지갑을 열더니 종이쪽 하나를 끄냈다. 묻지 않아도 보증수표이다.
『박군이 드리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구 새 살림을 마련하십시요』
수련이는 수표를 받아들었다.
『일금 오백만환』
큰 돈이다. 수련이가 일생동안 발버둥쳐야 잡아볼 지 말지한 돈이 다 박영진이가 사업에 성공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수표이다.
『이렇게 많이…』
수련이는 덜컥 이런 소리가 나왔다.
『하…하… 뭐 많다구 그러십니까. 박군은 지금 큰 부자입니다』
안명철은 마치 자기 자랑이나 하듯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마음을 트고 대하구 보니 안명철은 뜻밖에 명랑했다. 아마 소임의 중대함을 통감하구 일시 신경이 꾸들어졌었나 보다. 그리 대단치 않은 사나이라고 추측됐다.
수련이는 비로소 침대가 보이는 「호텔」방이 꺼림칙 해졌다. 박영진의 아내라는 의식이 따져지며 일어난 생각이다. (얼른 가야지 여인이 자고간 형적이 보이는 곳에 오래 있어선 안 돼)
수련이는 일단 숨을 돌리고 일어섰다.
『아니 벌써 가시려구…』
『네 가봐야죠. 안선생님 아직 아침도 안 잡수신 것 같구』
『참 같이 식사 하실까요』
『전 벌써 먹구 왔읍니다』
『그럼 나종 또 연락해주세요. 「홍콩」에 전화걸 일도 있구허니…』
『이따 몇시쯤…』
『글쎄올시다. 「홍콩」 전화는 밤이 좋습니다』
『밤 몇시쯤』
『열시쯤 어떨까요』
『좋아요 그럼 열시에 다시 뵙죠』
『일단 전화걸구 찾어주세요』
『네』
이 사나이는 분명 서울에 오는 길로 여자친구가 생긴 모양이다. 이런 종류의 사나이는 너무나 많이 보아온 수련인지라 놀라지는 않으나 박영진의 친구라구 보니 어딘가 께름했다.
(도대체 이런 종류의 사나이로서 천주교의 묵주를 보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공손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수련이는 다시금 고개를 깨웃둥 했다.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천주교를 믿지두 않으며 묵주를 내논 잘못을 범했으니 아예 모른척 해두는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련이는 수표와 묵주를 겹쳐쥔채 일어섰다.
『그럼 밤 열시!』
『네 열시입니다』
안명철은 아까와는 달리 앞을 서서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