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共産主義問答式解說((공산주의문답식해설)] (32)
발행일1962-08-12 [제338호, 2면]
共産主義歷史(承前)
【문228답의 계속】 그러나 이와같이 고발하는 맑스와 엥겔스가 바로 공산당선언의 주요한 표어를 마라와 같은 자기네들 이전의 사람들의 것을 얻어서 한 것이었다.
하여튼 화이뜰링은 야비한 고발로 구라파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또 공산주의를 채택하도록 맑스와 엥겔스를 지도한 모서스 헷스 박사 역시 화이뜰링을 변호했다니 자기처와 패륜적 행위를 했다하여 비난 공격을 받았다.그러나 이같은 비난은 이 방면에 입도 못열 정도의 죄를 가지고 있는 엥겔스가 행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광스런 소리다.
【문229】 『공산당선언』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무엇때문에 일신(一身)을 바쳤는가?
【답】 이 책의 결론으로 그 목적이 적혀있다. 이 목적에 일신을 바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회조건을 폭력으로 번복시키는 것이다.
【문230】 공산당연맹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답】 비록 맑스가 자기 방법을 써서 명목상의 승리를 걷두었을지라도 공산당연맹 내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는 다른계획을 모색하여서 공산당연맹의 본부를 「꼴로너」로 옮기도록 결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수차에 걸쳐 그가 제일차 국제노동동맹을 조직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꼴로너」에서 맑스는 자기를 지지하는 비밀당원을 충분히 가지게 되고 또 이 비밀당원들의 노력으로 결국 공산당연맹을 없애버렸다.
【문231】 언제 어떻게 제1차국제노동연맹이 조직되었는가?
【답】 공산당연맹과 같이 맑스 자신이 제1차 국제노동자연맹을 서룰러 조직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1862년 「런던」국제박람회에 참석한 독일과 불란서대표들에게 영국노동자들이 다과회를 베풀고 이 석상에서 그들과 결의한 결과 생긴 것이다. 이 모임의 결과 1864년 6월 28일 「런던」 「세이트 마르틴」 회관에서 국제노동연맹으로 발족했고 나중에 제1차 국제공산당대회로 불려졌다.
【문232】 1864년에 조직된 제1`차 국제공산당대회에서 맑스는 어떠한 구실을 했는가?
【답】 국제노동자동맹이 처음에 조직되었을 당시에 맑스자신은 간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동맹창설 기념사 편집위원회의 회원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 노동자대회에 제출하게된 초안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맑스는 그 문헌을 공산주의 딱지로 일관해 버렷다. 그는 그 문헌에 인용한 진리 정의 윤리 등 몇몇 저급한 「부르조아」적 말투를 할 수 없이 썼다고 원망했다. 그러나 국제노동자동맹총회에서는 이와같은 말투를 집어넣기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 문헌은 『공산당선언』에서 결론으로 알려진 「슬로간」 『세계노동대중은 뭉쳐라』는 말로 끝난다.
【문233】 제1차 국제대회가 얼마동안 계속되었는가?
【답】 1864년부터 1876년까지 12년동안 계속했다. 이 동안 맑스가 총회를 좌우했지만 12년동안 내부 갈등과 의견차이로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문234】 제1차 국제대회가 존속하는 중 맑스의 가장 큰 반대자는 누구인가?
【답】 무정부주의자들의 지도자인 마이클 바꾸닌(1814-1876)이 1868년부터 국제노동자동맹을 둘러싸고 대두한 맑스의 주요한 반대자였다.
【문235】 마잌클 바꾸닌은 어떤 사람인가?
【답】 러시아 「투우르」의 귀족가문에서 출생한 바꾸닌은 폴랜드에 대한 러시아의 박해를 비난하며 반대하여 「짜리스트」군대생활을 그만두었다. 망명객으로 푸르돈의 제자가 되었는데 푸르돈은 『「소유」란 것은 바로 도적이다』라는 말로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바꾸닌이나 맑스는 국가란 것이 결국 없어진다는데는 합의로 보았으나 바꾸닌은 맑스가 주장하는 무산계급을 위한 독재라던가 그들을 보호하고 싸우는 공산당의 선봉적 구실 같은 중간혁명을 부인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