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44) 餓饉(아근)때의 詩(시) ①
발행일1962-08-12 [제338호, 4면]
「타만라셋트」로 돌아오자 신부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두터운 환영을 받았다. 그가 돌아온 것은 「투아레그」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가 참으로 자기네들과 같이 살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뭇사가 「호가아르」의 여러부족을 조직화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부는 이때 또다시 안정했던 규칙적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결핍은 미사를 드릴 수도 없고 성체를 조배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또다시 폴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꼬오는 언어연구에 더욱 열중했다. 벤 매시시가 출발하고 없었기 때문에 바 함무우 라고 하는 뭇사의 비서의 협력을 얻었던 것이다.
바 함무우는 대단히 소문이 많았기 때문에 신부는 그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았다. 「트리포리」지방의 랏트의 추장의 아들인 그는 45세였으며 「호가아르」에 22년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아메노칼과 그다음에는 뭇사의 개인적 비서이며 상담역으로 지내왔다.
『외관으로는 선량한 회교도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바 함무우라는 사나이가 열성이 부족하고 경솔하며 정직하지 않고 속이 검고 그밖에 많은 악덕과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머리가 좋으며 기억력이 좋고 무사보다도 누구보다도 「호가아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과 사람들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가 친밀하게 지내던 아히타렡의 덕택으로 옛날 전설을 전부 알고 있다. 즉 그는 대단히 쓸모가 있으며 교육이 있는 흥미있는 인물이었다.』
샤르르는 이 사나이를 고용하고 있었다. 샤르르는 3개월간 한달에 백프랑을 주고 이 사나이를 은둔소에 오도록 했던 것이다.
신부는 모티린스키가 투아레그어 문법과 어휘에 대해서 남겨놓은 초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는 쉴새없이 이 초고를 완성하기 위해서 일했다. 사전과 성서번역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서둘렀던 것이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그가 이러한 박식한 노작을 하고 있는 동안에 겨울이 가까워짐에 따라서 정세는 점차로 불안하게 되어갔다.
『이해 이 지방의 기후는 불순했다. 17개월간이나 비가 오지 않앗다. 이것은 우유를 주식으로 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다만 우유에 의해서만 살고있는 이지방에 있어서 그것은 더 기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산양은 대지와 함께 말라 붙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산양과 같이 말랐던 것이다.』
라페리이느는 후꼬오가 말한 것 이외에 또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가장 감동적인 그의 자비심에 가득찬 고안에 대해서 한마디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친 겨울철에 대기근때에 그가 조직한 급식이다. 하루에 한번 이 지역의 모든 아돌들이 그에게 와서 배불리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나는 이 기근으로 유명한 겨울철이 끝날무렵에 자칫하면 그가 죽었을지도 모를 그의 극단적인 금욕을 거의 금욕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커다란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만일 책임을 지운다면 그것은 그의 애덕때문이었다. 그처럼 기뻐서 먹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기 몫을 남겨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신부는 일과 먹는 것으로서 기진맥진해 있었다. 라페리느에게 약간의 콘덴스 밀크와 강장 음료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쓴것을 보아도 아마 그는 극도로 쇠약해 있었던 것 같다. 동시에 그는 종자매에게도 써보낸 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삼일 기침도 하지않고 별로 가슴이 아픈 것도 아닌데 약간 몸을 움직이면 기절할 것 같이 숨이 가쁩니다. 때로는 이제는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이러한 실정을 보고받기 이전에 라페리이느는 이 기근을 당해서 자기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걱정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에게 급보를 전한 것은 「투아레그」인들이었다.
『우리들은 1908년의 그의 병을 뭇사 · 아그 · 아마스타아느의 편지로 처음 알았다. 그는 후꼬오가 때때로 장시간 실심상태에 빠지는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랐건 것이다.』
라페리이느 대령은 「인 사라」로부터 「산더미만한 식량품」을 그에게 보냈다. 그것은 후꼬오가 청했던 것 보다 4배나 더 많은 것이었다.
프랑스로부터는 귀국해서 휴양하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편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 샤르르 수사는 그것은 자기의 수도자로서의 상반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러한 극적인 수개월이 지난후 그는 교황으로부터 한사람의 보미사가 없이도 미사를 드려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것은 게랑 주교의 친절한 알서의 덕택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무엇보다도 바라고 있던 큰 기쁨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결핍된 것은 지상의 빵뿐이 아니라 성체의 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6월에 라페리이느는 「타만라셋트」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텐트를 후꼬오의 은둔소와 나란히 쳤다. 그는 감탄과 기쁨에 넘쳐서 그 은둔소에 「푸리게에트함(艦)」이라는 변명을 붙여주었다.
『나는 어느날 오후 사관 한사람이 켐프용 책상에 앉아서 성당에서 도로의 약도를 청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령은 그 유명한 작업실에서 책상에 앉아 무엇을 쓰고 있었다. 그의 의자는 신부의 뱃트와 접해 있었다. 한편 신부는 성당의 벽과 그가 책상대신으로 이용하고 있던 침대의 다리 사이에 앉아있었다. 세번째의 사람은 응접과 창고를 겸한 방의 밀섬 위에 앉아서 책상을 문지방을 향해 놓고 거기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각 사람들은 자기의 일자리에 차례차례로 앉아야했다. 만일 성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문밖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일어선다면 다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이 그를 통과 시키기 위하여 일어서야 했다.』
이처럼 빈틈없이 신심서(信心書) 언어학 또 사하라 사막에 관한 민속학의 서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일은 쉴새없이 찾아오는 방문객에 의해서 중단되었다.
『뭇사는 매일 나를 보러왔다. 올때마다 나에게 가는 길에 여기서 약4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자기의 캠프를 방문해 달라고 간청했다. 어느날 나는 내가 그에게 대해서 품고 있는 깊은 신뢰심을 표시하기 위해서도 그를 돌연히 방문하려고 결심했다. 우리들은 뭇사의 캠프를 향해서 아무런 호위도 없이 무기하나 없이 총도 「사아벨」도 피스톨도 없이 떠났다. 그때 우리들은 네사람이었다. 즉 드 후꼬오 신부, 드 상 레제 중위, 시고네 중위 긜고 나…… 살아있는 한 나는 그때의 기쁨에 빛나는 뭇사의 얼굴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는 것을 보자 그는 기쁨에 넘쳤다. 내가 이러구 저러구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즉시로 우리가 그에게 표시한 존경과 신뢰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라고 라페리나는 기록하고 있다.
이 여행에 있어서 라페리이느는 젊은 「다이독크」인 에루우를 만났다. 이 사나이는 『가수』(歌手)라는 시(詩) 속에서 그당시 프랑스 사관들이 기르고 있던 수염을 경멸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개수염 같이 긴」 수염이라는 것이다.
『나는 유명한 시를 알고 있다고 그에게 말하지 않고 그가 우리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에게 암시했다. 그는 그것도 참말이라고 솔직히 말하면서 그러나 우리들이 「투아레그」인에게 대해서 대단히 관대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지도에 기꺼이 추종할 것을 바라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내가 그의 말에 대단히 만족하며 이순간부터 우리들은 동지 「아미디이」(문자 그대로 하면 아라비아 습격부대 분견대의 동지)라고 그에게 말했다.
「다만 네가 나에대한 시를 지을때 나의 수염을 개수염에다 비교하지 말아주는게 좋겠다」 에루우 청년은 대단히 곤란해하며 무엇인지 변명을 했다. 일동은 크게 웃었다.』 이것은 라페리이느의 기록이다.
그당시 「구우라라」 「투우아」 「이디켈트」 「사우라」 「이그리이」와 「베니 구미」 또한 「호가아르」를 포함하는 광대한 사하라 사막의 지역 요컨데 오아시스가 있는 전 지역에는 약10만명의 주민이 있었다고 고오티에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