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니라』(마두 17·8)
예수 현성용(顯聖容) 복음 안의 이 짧은 구절은 종도들이 보통 인간 조건으로 귀화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록 공포 속에 잠기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영광 중에 빛나는 예수의 천주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수난 당시 그는 더러운 얼굴을 하고 악당에게 무참히 짓밟히게 될 때 그의 천주성은 조금도 들어나지 않았으며 열심한 신자들의 신앙도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친밀히 지나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하겠읍니까?
그들은 예수의 인성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어 비난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지혜와 권능을 얻었는고? 이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며 그 모친은 마리아라 부르는 이가 아니냐?고 그러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배웠느냐?』(마두 13·54-56)
많은 사람들은 이런 비난을 금하지 못하며 예수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들 구원의 길을 배척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또한 천주가 그들 가운데 와서 인성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고 또 그들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부인하러 듭니다. 그러기에 요왕 종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본땅에 오시되 그 백성이 영접치 않으니라』(요왕 1·11) 오늘도 천주는 우리들 가운데 계시며 그는 그의 교회 안에 계십니다. 즉 천주는 인성이란 보자기를 쓰고 나타나며 우리와 다름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고 있읍니다. 천주의 말씀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천주의 생명은 그의 손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즉 영세주고 강복하고 죄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축성하고 분배하는 사제의 손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주께 이르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또 교회에 의해서만 우리는 천주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 없이 그리스도에게는 있을 수 없던 것이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오 주 예수의 결백하고 거룩한 인성에 비해서 그를 대리하는 사제에게는 인간의 결점 인간의 잘못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와 인간 사이를 잇는 이들 중개자가 불완전하다 해서 선 자체신 천주를 배반해야 할 이유는 어디 있겠읍니까? 모든 신자들은 목자들이 완덕에 이르도록 더 많은 기구를 해야하겠읍니다. 모든 신자들은 또한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 안에서 어떤 책임감을 느껴야만 합니다.
「바리세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잘못을 찾으려고 애썼으며 종도들에게는 많은 함정을 만들어 그들을 괴롭히려고 노력하였읍니다.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품행이 나쁜 사람과 자주 만나고 정신병자며 마귀든 자라니 갖은 비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불명예스런 소리를 들었으며 교회 안에서 어떤 잘못을 발견할 때 그들은 더욱 비난의 소리를 높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세상의 중상모략을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비난자의 으뜸인 마귀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되겠읍니다.
단 하나의 악이란 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니 즉 천주의 계명에 반대하는 인간의 의지 양심적 결단적 반항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가 나날이 증가되고 도저히 없애버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큰 잘못인 것입니다. 다행히도 통회 보속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흔히 우리들 눈에는 드러나지 않으며 그 표면만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의 영광스런 처주성도 항상 밖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읍니다. 그렇다고 예수의 천주성을 무시하고 그의 인성만을 들어 비난해야 옳겠읍니까?
교회 안에서 우리는 충실해야하며 우리에게 천주 신비를 믿을 특전을 받았을 때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 있어서 실망을 느끼고 고통과 의심이 우리 신앙을 시험할 때 우리는 더욱 교회에 충실해야겠읍니다.
그리스도는 종도에게 「타볼」산에 집짓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그들이 먼지나고 험한 길 위에서 자기를 따르라 하지 않았읍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 가장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명을 들으라』 아멘
兪在國 神父(부산 서면 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