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17) 黑(흑)과 白(백) ③
발행일1963-03-10 [제366호, 4면]
수련이는 흑백을 가리는 숨가쁜 고비판에서 겨우 누명(陋名)을 벗고 결백함을 나타냈다. 몹시 대견했다. 「호텔」문을 나서며 다시 한 번 묵주를 꼭 쥐었다. 감사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내 반드시 천주교를 믿어 참으로 지닐 수 있는 묵주를 쥐고 살리라) 이런 생각이 끓어올랐다.
(도대체 안명철이가 어째서 묵주를 그렇듯 존중(尊重)하는지 까닭을 몰라 궁금해…. 그러나 깊이 묻다가는 이쪽에서 대답이 막힐 것 같아 더 무를 수도 없고….)
그러나 어쨌든 흐뭇했다. 그동안 겪어온 고초가 거름이되여 새 봄 맞이가 화사할 것만 같았다.
수련이는 「호텔」에서 나오는 길로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재빠르게 안양으로 가서 미남이를 데리고 오자는 것이다.
『미남이를 밤 열시까지 「호텔」로 데리고 가서 국제 전화가 통하거든 저이 아버지 음성이라두 돌려 주어야지』
수련이는 부풀어오르는 기쁨을 걷잡지 못했다. 미남이 아버지 사진을 어머니에게 보일 생각도 다급했다. 발걸음이 땅에서 들떠오르는게 마치 꿈길이라도 걷는 것 같았다. 수련이는 기차 시간이 마땅치 않아 뻐스를 탓다. 일분 일각이라도 속히 안양으로가려는 생각에서이다. 뻐스가 서울을 떠나 한강철교를 건널때 유유히 흐르는 강물결이 오늘은 미소를 띄운듯 반가왔다. 노량진에서 어느 중년 부인이 어린아이 손목을 잡고 올랐다. 미남이만한 아이가 어머니를 졸랐다. 앉을 자리가 없는 까닭이다.
『저! 애기 여기 앉히세요』
수련이는 선뜩 자리를 내주었다.
『왜 앉으시지 않구』
애기 어머니는 뜻밖의 호의에 앉기를 망서린다.
『어서 앉으세요 괜찮습니다』
수련이는 아무나 보고-
『나는 지금 행운을 안고 아들을 데리러 가요』 하구 싶은 심정이다.
『엄마 앉을까』
어린아이는 벌써 빈자리에 올라타고 창밖을 내다본다.
『온 아이두 염치두 좋지』
애기 어머니는 민망한 표정이다.
『어서 애기 무릎에 안구 앉으세요』
수련이는 다시 한 번 미소를 띠웠다. 기쁜 일이 있으면 누구나 세상이 온통 기껍게만 보이기가 일수이다. 지금 수련이는 미남이와 같은 나이의 아들을 데린 어머니에게 무한 호의를 베풀고 싶었다.
『미안합니다.』
애기 어머니는 마지 못하는척 자리에 앉았다. 수련이는 손잡이를 찾아 좀 더 앞으로 나갔다. 어느 틈에 애기는
『송아지 송아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수련이는 힐끗 돌아보며 또 한 번 미소를 보냈다.
(미남이가 아버지와 전화를 하는 날이다. 평생 처음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는 생각이 마냥 가슴에 피어올라 어느 틈에 안양까지 오고 말았다.
『안야야 내리세요』
차창의 소리를 듣지 않았드면 군포(軍浦) 수원(水原)까지도 갔을지 모를 번했다. 안양서 하차한 수련이는 거의 뛰다싶이 안말로 들어섰다. 집에 와보니 미남이는 앞뜰에서 동무들과 놀고있었다.
『엄마…』
소리를 치며 달려와 덜컥 안겼다. 언제나 하는 버릇이다. 그러나 수련이는 언제보다도 미남이를 대견스럽게 꼭 껴안았다. 웬일인지 눈물이 흘러나왔다.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리라.
『할머니 집에 계시냐』
『할머닌 목장 집에 갔어』
『목장집엔 왜』
『몰라 목장집 아저씨가 오라구 했나봐』
수련이는 윤인상이와의 관계를 더듬어 봤다. 만일에 윤인상이 재혼을 했더면 지금 어떻게 됐을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가벼운 몸서리가 처졌다.
(잘 참았어 미남이에게 큰 죄를 지을번했어) 미남이는 엄마의 손목에 매달렸다.
『엄마 목장 아저씨헌테가… 나만보면 늘 이쁘다구 해… 할머니두 가 있으니 우리두 가봐』
미남의 말을 듣고보니 인상이는 아직도 미련을 끊지 않고 미남이를 귀여워하는 모양이다. 입맛이 썼다.
『엄마는 안갈래. 어서 너 혼자 가서 할머니 오시라구 해』
수련이는 미남이를 달랬다.
『그럼 내 얼른 갔다올게』
미남이는 신이나서 뛰어갔다. 아비도 모르고 자라는 아이라구 측은히 여기던 생각이 활짝 가시고보니 무한 귀엽기만 했다. 얼마 안있어 어머니는 달려왔다. 어머니만 오는게 아니라 인상이까지 따라왔다. 어머니보다 인상이가 앞을서 들이닥쳤다.
『아-니 벼란간 우네일이세요』
인상이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수련이는 재빨리 표정을 고치며 새침스럽게 응수를 해야했다.
『우리 미남이 아버지가 서울로 오시게 돼서 미남이를 데리러 왔어요.』
인상이에게는 청천벽력이요 최후 통첩이다. 미남이를 귀애한 것도 미남이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겠다는 의사표시었는데 이제는 맥이 풀리고 말게 된 것이다. 마음의 균형을 잃은 인상이는 잠시 말을 못했다. 이런 경우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 것인지 인상이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과제이다.
『아니 미남이 아버지가 정말 서울에 와있니』
어머니가 곁에서 물었다.
『어머니 얼른 미남이 깨끗이 씻기고 옷 좀 갈아입히세요. 곧 서울로 데리구 가야해요.』
수련은 필요이상 서둘렀다. 윤인상 이에게 대한 하나의 경고이다. 인상이는 반가와 웃던 얼굴이 웃던 그대루 꾸들어진양 멀건히 섰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그럼 난 실례하겠어요』
말끝도 맺지 않고 돌아서 나갔다.
『아저씨 안녕』
미남이가 소리를 쳤다.
『미남아 이젠 아저씨헌테 가지마!』
수련이는 약간 노여움을 띠고 한마디 했다. 그것은 미남이더러 하는게 아니라 어머니더러 들으라는 말이었다.
『괜-히 그런 사람 가까이하면 미남이 아버지헌테 오해받아요』 멀숙허니 듣고 있던 어머니도 이제야 낯빛을 고쳤다.
『수련아! 아무 염려 말어. 인상이두 눈치가 있거니 이젠 다신 안 올거다.』
『미남이 아버지가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가 뒷조사를 무척했나봐요. 다신 인상이헌테 가지 마세요. 동리에서 모두들 인상이와 짝이 된다구 수근거리는 모양인데 괜히 큰일나요.』
『오-냐 알았다. 그래 미남이 아버진 어떻게 만나게 됐니』
『그 이는 지금 홍콩에 있어요. 큰 부자가 됐대요.』
『장가는 들었겠구나』
『그저 혼자 산대요. 이 사진을 보세요』
『이 사람은 늙지도 않었구나』 어머니는 사진을 들고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오늘밤 열시에 홍콩에 있는 미남이 아버지와 전화를 걸게됐어요. 그래 미남이를 데리구 가서 저이 아버지 음성이라두 들러 주려구…』
『그 사람도 뻔뻔도 하다 노상 내버려두다가 지금와서 뒷조사는 다 뭐야』
어머니는 실정을 알게되자 분노가 터졌다.
『아무 소리 마세요. 인젠 다 잘될텐데 뭘 그러세요 지난 고생은 꿈꾼셈 치고 미남이에게 아버지를 찾아주어야죠』
『그야 그렇지만 너무 괫심하잖아 제가 무얼 잘했다구 뒷조사냐말야 소식도 없구 민적두 없구 먹구 살거리조차 없는 형편에 무슨 짓을 했던 시비할 경우가 되냐 말이다.』
『어머니 그만 참으시구 어서 미남이 옷이나 입혀주세요. 이젠 어머니두 고생하시지 않고 사시게 돼요』
『나는 죽어도 서울엔 안 가 산다.』
어머니는 딱잘라 한마디 했다.
『나두 그래요 이왕 터를 잡았으니 안양에 눌러살구 싶어요』
『그렇게 되면 인상이네 농장을 사자! 네가 이렇게 되면 인상인 아마 안양서 안 살거야』
『아이 인상이 이야긴 그만 좀 하시래두』
수련이는 짜증을 냈다. 어머니는 부리나케 미남이를 데리고 새 옷을 꺼내 입혔다.
『자! 어서 데리구 가거라』
『할머닌 안가』
미남이가 물었다.
『내일이면 안양으로 도루와! 어서 엄마 따러가서 아버지허구 전화통에서 만나』
할머닌 손등으로 눈을 비볏다. 수련이는 미남의 손목을 잡고 부리나케 정거장을 향해 내려갔다. 지나는 길에서 천주교 성당이 보였다. 수련이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숙으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