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45) 餓饉(아근)때의 詩(시) ②
발행일1962-08-19 [제339호, 4면]
이 지방에 평화를 가져온 것은 다만 무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여러가지 상호적인 존경과 신뢰하는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호가아르」에 있어서는 그것은 라페리이느와 뭇사 그리고 그밖에 여러사람들의 협동적 일인 것이다.
「호가아르」에서는 부인들은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인들이 이 화해의 대업에 공전한 바는 적지 않다. 뭇사의 종자매이며 여자 친구들이였던 「겔 아하가아르 족」(族)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여류시인이며 아름다운 귀부인 다시이느는 이 부족 가운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그 부인들도 다른 부인들도 신부의 은둔소 가까이 올 수 없었으나 신부는 때때로 그들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가 「투아레그」의 상류귀족의 노귀부인들을 겨우 만났을 때』와 더욱이 이것이야말로 후꼬오 신부에게 있어서는 생각지도 안한 좋은 기회였다고 라페리이느는 우리에게 말하였다. 왜냐하면 전통과 전설계도(系圖) 시(詩) 등에 가장 통효(通曉)하고 있는 것은 그 부인들이기 때문이다.
『땅위에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차를 마시거나 파이프를 빨고 있는 점잖은 노부인들이 있는 곳을 여필을 들고 그가 돌아다니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광경은 없었다.』
신부는 수도생활에 들어간 이래 결코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나 한잔의 차에 의한 정치를 그도 또한 라페리이느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사용했던 것이다. 이 우습게 생각되는 정치는 언어의 교만(驕慢)으로 비인간적인 의미에서의 정치를 부정하는 것인 것이다.
건조하여 목마르게 하는 사막에서는 녹차(綠茶)는 주민들의 중요한 음료인 것이다. 대상(隊商)이 쉬게되면 즉시 차를 끓이기 위해서 불을 피운다. 또 여행지가 도착하자마자 차를 내놓는다. 이것이 하루에 몇차례씩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허물없고 엄숙한 의식인 것이다. 이 정중한 대접을 하는 의식을 주최하는 사람은 팔팔 끓는 물과 녹차에다 박하잎과 여러가지 크기의 사탕쪼각과 사탕망의 덩어리를 좋난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결코 열에 깨지지 않는 두꺼운 가느다란 컵에 도라가면서 차를 따루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따루는 것으로 접에 잔뜩 차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탕이 가장 많이 녹은 부분은 밑바닥에 가라앉아버리고 맨처음으로 따라논 겁에는 사탕이 녹지않아 슴슴하고 뒤에 따른 컵은 너무 달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한번에 아주 소량의 차를 각각 컵에 따르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채우려면 5·6차나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수다를 떨면서 손님들은 컵을 들어서 조금씩 마시고서는 먼저 자리에 놓는다. 그다음 차잔이 바뀌는 것은 아른체도 하지 않으며 2차 · 3차까지 차를 마신다.
그래서 신부도 프랑스사람들도 이 풍습을 따랐다.
단순히 조갈증을 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사교적인 결합을 공고하게 하는 이 옛풍습에 어긋나게 하는 사람은 전혀 교양없는 인사임에 틀림없다. 같이 앉아서 차르 ㄹ마시는 동안에 사람들은 친밀하게 늘어앉으며 같이 의론을 주고 받는 것이다.
그 화제는 마음에 끌리고 정열을 북돋아주며 혹은 재미나게 해주는 즉 사냥과 수확, 낙타 집안의 걱정, 정치 사건, 결혼, 아이들의 출생, 사람이 죽은일, 아라비아인의 습격, 그리고 종교문제에 이르기까지 논하는 것이다.
차는 만능약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 서로서로 함께 모여서 마시고 혹은 먹는다는 것은 계급과 종족의 어색한 편견이 방해가 되기 쉬운 이 인간들 가운데에서 서로 대화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부는 「투아레그」인들이 있는 곳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들의 말을 지꺼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신부를 만나고 음식을 같이 하는 것이 습관화 되었으며 그의 우정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으므로 신부를 방문하고 끝없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신부에게 대하여 다만 자기들의 관심사를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친밀하게 알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종교화집(宗敎畵集)을 열중하여 보면서 그에게 무수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부가 자기들에게 복음서를 번역하여 들려주는데 귀를 솔곳이 기울인다. 이리하여 미지(未知)의 광명이 「호가아르」에 빛날 것이다. 신부는 「투아레그」인들과 차뿐 아니라 굶주림까지도 같이 맛보았으므로 그들은 그의 금욕주의를 눈으로 보고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종교적 생활은 그들에게 고민거리가 될 문제를 주는 것이었다.
『그가 다섯 어린이를 1907년의 기근에서 구해낸 이래 드 후꼬오 신부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바치고 있는 「호가아르」의 귀부인이 어느날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라페리이느는 말하고 있다.
『회교도가 아닌 까닭에 이런 훌륭한 사람이 사후에 지옥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겠읍니까. 그리고 그 부인도 자기와 여러 친구들이 이 은수자가 회교도가 되도록 날마다 아라비아의 신께 기구를 바치고 있는 것이라고 나에게 고백했다.』
그당시 신부는 또다시 바쁜 일에 얽매여있었다. 그의 불굴의 계획인 사전편찬을 하는 외에 여기의 거의 전부를 그가 최근 하고 있는 대여행중에 수집한 「투아레그」의 시를 편찬하여 번역하는 일에 바치고 있었다. 그이듬 11월까지에 6천행의 시를 번역하였다.
이와같은 때에 라페리느의 간청에 의하여 뭇사는 「트리포리」 지방의 국경에 면하여 「후랏테르」 요색이 세워진 「테마시이느」까지 5천키로그람에 달하는 물건을 수송하는 대대적인 대열을 조직했던 것이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호가아르」의 거의 전부의 낙타와 일 할 수 있는 모든 장정을 동원시키든지 혹은 약 4백명으로 된 대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보통때는 사용되지 않는 이와같은 원정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8월에서 12월까지의 3개월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다만 사람과 낙타를 모을뿐만 아니라 일행의 식량을 어떻게 해야될지 이것을 미리 생각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신부는 몇번이나 아세노칼과 시고네 중위와의 사이를 조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만사를 원활하게 진전 시키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는 뭇사의 이름으로 낙타병들이 「테마시이느」에서 물건을 살 수 있게 미리 급료를 선불하도록 주장했다.
그는 또 뭇사가 집에 없을 때는 부인과 노인, 아이들만이 남아있는 「호가아르」를 중위가 세심한 주의를 다하여 수호해 주기를 요구했다.
뭇사가 멀리 가있을 때 아메노칼은 공식으로는 그의 막료의 한 사람인 아크메드 아그 에케 세리프가 비공식으로는 그의 종자매인 다씨이드가 대행하였던 것이다.
「결정을 내릴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다씨이느인 것이다.』라고 신부는 기록하고 있다. 『그 여인은 나타나지 않고서 지도하였으며 아크메드는 다만 그 실시에 힘쓰고 있다. 그 여인은 대단히 총명하고 모든 일에 통효하였으며 그는 활동적이며 선의에 가득찬 사람이었다.』
다씨이느는 달이다. 그 여인의 목은 4월달에 보리밭과 밀밭에 매여있는 어린 망아지의 목보다 아름답다.
신이 그 여인을 조화와 우아에 가득차게 조성하셨다.
그 여인도 모든 사람에게 찬양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
여인은 조촐한 결혼조차 할 수가 없다.
다씨이느가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한 점점 그 여인은 자유롭고 우아하다.
그 여인은 바요린을 켰다. 그리고 여인의 노래는 감미롭다.
나의 사랑의 표적으로서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과 동물의 무리를 여기서부터 구우계랑까지 낙타와 산양이 있는 목장의 모든 것을 너에게 주리라.
만일 네가 내마음에 따른다면 오오 다씨이느여 별들 사이에서 빛나는 태양이여 그러나 그 여인은 나를 본체도 않는다.
그 여인은 나에게 한눈도 드러내지 않는다.』
뭇사는 이와같이 원하듯이 노래를 불렀다. 이외에도 여러 사람이 다씨이느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던 것이다. 눗사가 아라비아인 습격으로서 무훈을 세웟다 하더라도 그는 듀베리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 속에 결정한 여인과 결혼하지 못했다. 수없는 강자중에서 여인은 아프락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뭇사와 다씨이느는 변함없이 사이좋은 친구였다.
1908년 중에 투아레그의 문법의 소론이 발간되었으니 그것에는 모티린스키의 이름만이 실려있었다.
게랑 주교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자기 이름을 표지에 기재할 것을 명백히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