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기도]
발행일1962-08-26 [제340호, 2면]
『가톨릭시보』가 이 난(欄)에 연재하는 『기도의향』은 직접 교황청이 예부성성이 결정한 그것입니다. 연재하고 있는 의향 및 기구는 직접 로마에 있는 사도적 기도회가 작성한 것으로 전세계에서 통일되히 사용하는 것이며 구라파서 수년간 전례 및 음악을 연구한 본사 주필 스테파노 신상조 신부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 일반 의향
公議會 結實 豊盛하길
『공의회사업이 순조로이 진행되고 좋은 결실을 가져오기를』
주 예수여 당신은 당신 교회와 함께 세상 마칠 때까지 계실 것을 약속하였나이다. 공의회를 개최하는 이 마당에 있어 이 약속을 우리에게 다시 보증해주시고 우리에게 신뢰를 주소서. 미구에 우리의 주교들이 당신 대리인 교황을 둘러싸고 교회의 중대사를 심의하고 백성 사이의 잦은 접촉에서 제출되는 문제를 토의할 것입니다.
이 일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오며 그들은 한마음이 되기를 원하면서 일치를 갈망하고 있나이다. 당신만이 그것을 그들에게 드릴 수 있나이다. 당신만이 흩어진 천주의 아들들을 한몸으로 모을 수 있나이다. 성 베드루의 후계자에게 이러한 위대한 공의회를 열게 해주신데 대하여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공의회는 아직 시작되지 아니하였나이다. 당신의 현존이 일의 전진을 더욱 효과있게 해주시고 당신의 현존이 공의회 모든 교부들에게 도움을 주시고 위원회에서 토론을 준비하고 「텍스트」를 수정하고 그것을 교리와 전례와 규율부에 결정지우는 책임을 가진 모든 이에게 당신 도움을 많이 주시기를 기구하나이다.
예수성심이여 이 뜻으로 우리의 기도행동 기쁨과 슬픔 매일 당하는 좋은 일이나 하잔은 일이나 성공이나 실패를 당신께 바치나이다. 그리하여 내일 이전보다 더 빛나는 얼굴을 한 당신 교회가 우리 없는 양 뿐 아니라 온세상을 통해 일치를 찾는 모든 백성을 그 교회로 인도해주소서.
■ 전교지 의향
鐵帳幕 뒤 兄弟 記憶하자
『그리스도의 신앙과 교회에 순종하기 위해 고통을 당하는 전교지방이 겁내지 않고 박해를 견디어 나아가 굴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이달에 침묵의 교회를 위하여 기구하도록 요망되고 있다. 침묵의 교회란 주로 북한 · 중국 본토 · 북베트남을 말한다. 거기 4백만 가톨릭이 박해를 당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가톨릭이거나 회교도이거나 이교도이거나를 헤아리지 말 것이다. 그곳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박해와 위협 불의하고 불법적인 차별을 받고 있는 땅이다.
비록 기만을 감추고 위선적일지라도 우리가 언급한 나라들은 완전히 무자비한 박해를 보여주는 슬픈 특권은 가지고 있다. 그들은 침묵이라고 하는 교회의 슬픈 현실인 상징이다.
교회의 모든 활동이 억제되고 경제되어있고 교회의 존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에 복종되어 있다. 학교도 청년운동도 출판도 언론자유도 없다. 숨겨진 채 그리고 연약한 존재 그것이 교회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자 수도자 신부들은 그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충성을 지키고 있다.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란 박해자들을 놀라게 해주고 참혹한 장애물에도 탁월한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에서 괴로워하는 형제들을 우리는 생각하고 기구해주어야 한다. 그들은 언제나 괴로워하고 있다. 압박 공포 의혹 혼란 고독 방임.
목자 없이 사는 신자들은 스스로 버림받아 그들의 저항력이 날로 줄어지고 그들의 마음이 흐리게 되는 반대 현실에 잠기게 된다.
자유세계로부터의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되려 단조로운 선절의 끊임없는 반복(反復)에 흔들리고 부딪히고 꺾기는 등 계속되는 파도에 습격 당한다.
거기 정신의 밤과 암흑이 온다. 신앙의 밤이 온다. 거기 배반돠 반역의 예가 수두룩하다. 거기 관념적인 영광이 청년들에게 활기를 준다. 일의 낙담(落膽), 기아(飢餓)의 무거운 병 거짓만을 말하는 모임 그때는 벌써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고 누가 진실하고 누가 그릇치는지를 모르게 된다.
의혹과 고발과 비겁과 공포와 고독의 분위기가 되고 가정과 학교와 지방과 청년운동은 「스파이」와 고소와 선고의 장소가 된다. 광기(狂氣)의 분위기가 이루어진다. 묵상에서 반성하는 시간에서 숙고하는 가능성에서 성사(聖事)에서 멀어진다. 그리하여 성당에서 멀어진다. 아무런 지지 없이 신뢰없이 도움없이 여유없이 희망없이 홀로 벽만 쳐다보게 된다. 유감의 점이 많으나 그러나 천상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해가 갈수록 희박해진다. 의미해진다. 밤꿈처럼 그늘지고 분명치 않다. 희망없는 기도 그러나게 들어 허락함을 받지 못하는 기도가 천주께 올라가는 가슴이 찌져지는 듯한 기도를 천주만이 아신다. 밤이 모든 사람 교회, 이렇듯 이 많은 마음 위에 내려진다.
이러한 광경과 이러한 버림받음 앞에서 우리는 어름장 같이 지낼 수 있겠는가? 임박하고 있는 필요성에 눈을 돌릴 것인가? 우리의 주의와 우리의 기도에 요구되는 희사를 거절할 것인가? 「예리고」 도상에 누어있는 자는 남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형제다. 수백만의 우리의 형제이다. 그들은 배고파 하고 목말라 하고 무서워 떨고 있다. 이러한 무서운 광경과 멀리서 오는 무서운 소리와 이름없는 고통을 보고도 우리의 눈과 마음을 닫을 것인가?
『주여 외롭고 버림받은 우리 형제들을 위해서 당신께 기구하나이다. 그들의 망덕과 신덕을 돌봐주소서. 그들의 빛과 힘이 되어주시고 당신을 통하여 그들의 해방과 기쁨의 날까지 우리를 신뢰할 줄 알게 해주소서. 그들을 당신 사랑 속에 보호해주시고 밤에 흔들리는 발걸음을 인도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