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존재한 이래 그 흩어진 가족이 서서히 증가하면서 지면에 살았다. 그는 푸른하늘에 시선을 던지고 천체의 운행을 보고 밤별을 감상할 수 있었다. 몇천년전 인간이 천체의 운행을 관찰한 그때부터 과학연구의 첫발걸음이 시작되었다. 맨눈으로 또한 초보적인 계산기로 우주 현상을 관찰하여 놀라운 발명을 해온 것이다.
시각(視覺)으로서의 우주탐구는 오래전부터 많은 발전을 하였다.
큰 「텔레스코프」의 도움으로 우리의 눈은 사(吹入) 광도(光度) 전달 분광분석(分光分析 SPECTRAK ANALYSIS) 전기확대 「렌즈」의 덕으로 광도 전달의 강화 「라디오 천문학」 같은 새로운 방법으로 하늘을 측량(測量)하는 등 새로운 구상(構想)의 테마를 풍부히 거두었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관찰 능력에 유력한 힘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전까지 인간의 관찰은 자기적은 관측소(觀測所) 안에 강금되어 공간을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물체에 닫기(接觸)에 무능하여 천문학은 시초에 있었던 그대로 즉 순전히 관찰하는 과학이었다. 그러나 변화가 왓다. 과학은 인간에게 천공에 친히 갈 수 있고 발견한 어떤 천체위에 발을 디딜 수 있는 방법을 주었다. 몇해전 처음으로 태양계(系)에 사라없어지는 물체를 보낼 수 있었다.
1959년 10월 4일 루닉(KUNIK) 3세가 달 이면(裏面)의 첫 사진을 우리에게 낼 수 있었다. 동물들이 지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첫우주여행자였다.
「달세계에의 여행」이란 옛날에 한낱 가공적 상상에 지나지 아니했으나 이제는 실현 가능의 단계에 놓여있다. 그러나 과학 앞에는 아직도 거대한 곤란이 가로놓여있었다. 우주여행을 위한 정열적인 「에네르기」 없이는 - 군사 이유를 포함한 여러가지 이유로- 모든 것이 꿈으로 돌아갈 정도로 과학적 기술의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느냐. 이러한 연구도중 인공위성(人工衛星)에서 지구를 찰한 사람이 있었음을? 그리고 우주여행에서 돌아와서 그 여행 인상을 우리에게 들려준 사람들이 있었음을? 이것은 확실히 큰 성공이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우주정복이 아니다. 달세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달세계에 여행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천체에서 볼 때 달은 지구에서 매우 가깝다.
그 다음엔 화성이나 금성 같은 유성(遊星)에 여행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 아마 오래동안 우리의 가능성의 「프렛트품」만(정유장)이 될 것이다.
그외 우리 태양계(系)의 다른 유성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이러한 유성에 갈 수 있는 방법의 아무런 개념이 없는 만큼 우리와 거리가 멀다 하겠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큰 성공을 가져왔고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난이 존재한 수천년 전부터 눈에 불을 켜고 땅을 소유하고자 하였다. 백성들은 서로 다투어 대륙을 소유코자 하였다. 신대륙 발견 첫 여행이 1526년이었다. 이것은 과학의 무대에 들어가기 전 사회에 크나큰 헌신이오 유언(遺言)이었다. 오늘 닻을 내린 언덕땅은 없다. 우주언덕만 남아있다. 우리는 이땅의 언덕을 떠나려고 하고 있다.
「바이불」은 단순한 말로 천주께 관한 이야기를 하고 「바이불」 첫장은 하늘과 땅 그리고 거기 포하모디어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천주의 존재를 이야기 한다.
이방인(異邦人)들이 신화(神化)하고자 하는 하늘과 천체는 천주의 궁전도 아니다.
「바이불」이 하늘에 천주께서 사신다고 즐거이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도 천주경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신 자여』한다. 상징적으로 쓰이는 말은 천주 앞에 인간은 얼마나 미소한 것이며 천주의 섭리는 얼마나 미묘한 것인가를 상기시키는 것 뿐이다. 성서 저자는 이 단어에 속지 아니한다. 어떤 성서 저자는 천주께 대하여 『하늘과 하늘의 하늘이 당신을 용납할 수 없나이다.』하였고 한편 성서가 얼마나 가끔 하늘(SKY)이라 단수를 쓰지 않고 하늘들(SKIES)이라 복수를 쓰는 가를 주의해보라.
마치 성서가 새로운 단어로 천주를 우주의 어느 부분에 두려고 하는 이난의 불가피하고 위험한 유혹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 같다.
『천주를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고 성경은 또 말하였다. 설령 우리가 우주에 접근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주의 공간에 사는지 공간의 주인이란 문제는 아무 수용도 없다. 천주는 우주의 척규(尺規)가 아니다. 천주를 우주 속에 집어넣기에 그는 너무나 크다. 그럴지라도 우주는 천주의 현존에 떨고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신앙은 오늘 새로운 전도(前途)를 비우어준다. 『자식 낳아 번성하고 온땅에 채워 그를 복종시키라』 이 말씀이 천지 창조 당시 천주께서 사람에게 명하신 사명이다. 땅은 먼저 평원(平原)이요 산(山)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볼 수 있는 우주가 아니었다.
물질적 창조의 모든 면적은 우주공간고 포함한다. 바오로종도는 초대신자들에게 『모든 것이 너희들을 위해서엿다. 세상 생명과 죽은 현재와 미래도』라고 써보내셨다. 만일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면 우주도 우주선(宇宙船)도 우리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발명자는 이 우리의 것을 훔쳐서는 아니된다.
소련의 우주비행사 디토프는 미국을 방문하고 과학에 강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신학에까지 입을 대기를 감히 주저하지 아니했다. 무신론자의 이 우주비행사는 『나는 하늘을 돌아왔지만 천사도 신도 만나지 못했다.』고 신학에 대한 ABC 기초지식도 없는 자가 남이 묻지고 아니했는데 감히 자기 의견을 내갈겼다. 지구의 위를 몇 「킬로」 날랐다 할지라도 그는 천주의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신앙은 우리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하나의 질문이다. 그리고 신앙은 이 감격에 찬 모험에 도움을 주고자 진력한다.
오히려 미국의 우주비행사 세퍼드처럼 『오 이 우즈는 얼마나 아름다운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12일 이번 소련 두 우주비행사들이 우주를 여러차례 돌고 돌아왔을 때 교황 요안 23세께서 『그들의 우주비행을 천주께 봉헌하도록』 촉구하신 것은 의의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