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46) 잠시동안 빠리의 공기
발행일1962-08-26 [제340호, 4면]
1908년 봄에 신부는 프랑스에 돌아가서 쉬는 것을 명백히 거절하고 있었으나 12월말에는 귀국하는 도상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휴가를 얻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몇해동안 그는 동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미셀 수사와의 협동의 계획도 기대에 어긋나고 말았다. 사하라 사막에는 몇백개의 오아시스가 있고 그는 다만 한사람의 사제였다.
이 광대한 사하라 사막 속에서 한 수도자가 그리스도의 이름 밑에서 잠을 깨어 조물주이신 천주께 기구를 올리는 은둔소는 다만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얼마나 되는 기한? 신부는 아직 50세였으나 그해 그는 죽을번 했다.
죽음? 「앗씨시」의 성프란치스꼬와 같이 죽음을 『나의 자매인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죽음의 도래(到來)는 천주께서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은 자기의 후계자가 한사람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동지를 부르려고 하면 항상 극복하기 어려운 곤란에 부닥치게 되며 또 한편으로는 시간의 여유가 필요했으므로 신부는 다른 계획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직접으로 작은 형제와 작은 자매를 발견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에 같은 정신을 가진 제3회를 만들므로써 그 기반을 준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성심의 형제자매」의 단체가 된 셈이다.
그는 이 단체에 자기의 정신적인 유산을 맡기면 이 단체는 동지 혹은 자기를 대신할 사람들을 탄생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부가 프랑스에 돌아간 것은 이 단체를 창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선 「가르다이아」로 가서 게랑 주교에게 고해성사를 받고 자기의 게획을 말했다. 주교는 그의 계획을 승인했다.
뒤이어 그는 2월 18일부터 22일에 걸쳐서 빠리에 가서 「페르씨에」가(街)에 있는 종형제 드 봉디이 댁에서 2일간 묵고 또 유브랑 신부를 방문하여 그와 같이 「몽마르뜨르」의 성심성당에 가서 하룻밤을 조배하며 지냈다. 거기서 그는 동생 마리이를 만나기 위하여 「투우롱」까지 갔다. 성직에 들어간 이래 8년동안을 그는 동생과 만나지못했다. 최후로 그는 자기의 죽인 본네 주교에게 그 게획에 대한 승락을 구하려고 「뷔뷔에」로 향했다.
『미신자들을 회심시키려고 힘쓰는데는 단순히 물질적인 은혜로서 뿐만이 아니라 개척자 지주와 같은 명의로서 그들 미신자들 속에 여러가지 뛰어난 신분의 그리스도교들을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들 그리싀도 교도들은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뒷받침이 될 것이며 모범과 친절과 교제로서 원주민들을 신앙에로 이끌게 되는 것이며 그리고 미신자가 회심하는 때에는 한사람 한사람씩 거기에 가담하는 중심이 될 것입니다.』라고 그는 설명하였다.
주교는 찬성했다. 신부는 「식민지 정신」을 전혀 갖기 않고 성바오로의 친구인 그리스도교적 가족 아키라와 프리시라와 같은 정신을 가진 이상적인 개척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편으로 매우 늦게나마 새로운 단체에 기구하는 회원으로 참가할 결심을 한 사람들을 얻게된다.
그가 죽을 때 이 회는 약50명 가량의 참가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뷔뷔에」에서 샤르르 수사는 재차 아프리카로 향하였으며 전과 다름없이 「베니 아베스」에 잠시 들린 다음 1909년 6월 11일 「라만라셋트」로 돌아왔다. 이 세번째의 「호가아르」 체재는 평온할 것 같이 보였다. 비의 혜택을 받아서 목초지가 매우 아름다웠다. 샤르르 수사가 도착하자 방문객이 쉴새없이 찾아왔다. 이와같이 하여 미사, 묵상, 투아레그인들과의 회화 사전편찬 등이 그의 일상생활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모티린스키요색은 거의 낙성하게 되었다. 그때 한 사람의 프랑스인 석공이 일하는 도중에 중병에 걸렸다. 신부는 그를 때때로 돌봐주었다. 1910년이 되자 사태는 한층더 소란하게 되었다.
「켈 아하가아르」의 옛날부터의 적인 「트리폴리」 지방의 국경에 유목하고 있는 「투아레그」족인 「켈 아제에르」족이 「호가아르」의 동쪽에서 가축을 습격했던 것이다. 여름이 돌아옴과 동시에 평온이 회복되었으나 또다시 심한 가뭄이 돌아왔다. 뭇수가 이끌고 있는 「투아레그」인은 매년과 같이 「쿠디아로」 올라갔다. 그곳은 그들의 산속이어서 그속에서 피서와 여름동안의 유목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타만라셋트」에서는 농민을 보지 못했다. 샤르르 수사는 산의 중심까지 유랑민 뒤에 따라가려고 하는 새로운 열망에 불타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샤르르 수사는 「아제크렘」의 험한 고원에 새로운 은둔소를 세우려는 계획을 했다. 시고네 중위는 그에게 「모티린스키」 요색을 안성한 프랑스인 석공들을 그일에 쓰도록 허락했다.
유브랑 신부가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라고 2백프랑을 보내주었다. 일은 5월부터 시작되었다. 만일 비용이 모든 예상을 초과하지나 않나 하는 공포심만 없었더라면 이 일은 신부를 기쁘게 했을 것이다. 그만치 「아제크렘」은 근접하기 힘든 곳이었다. 2백메타 이상이나 되는 높은 단애 위에까지 사람들은 등에다 재료를 울러메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신부는 어떠한 댓가를 지불하드라도 유목민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다.
같은 달에 신부가 「호가아르」에 체재하기 시작한 이래로 생각하고 있던 계획이 실현되었다. 즉 아메노칼이 프랑스여행을 떤나 것이었다.
라페리이느의 초청으로 뭇사는 공식으로 1910년 빠리제에 초청을 받았다. 「호가아르」의 원주민의 장(長)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동시에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정부는 빈틈없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크뤼소」와 「무우랭 루오쥬」에 안내하고 「롱샹의」 열병식에서 「레지옹 돈너로」 훈장을 장엄하게 수여하는 것 등이었다. 뭇사는 오히려 프랑스의 옥야를 건느며 기차의 창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소와 양 같은 것에 상당히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샤르르 수사는 뭇사에게 동행할 수는 없었으나 자기동행과 의제의 소유지인 「바르비레에」에 그를 초대시켰다.
이 아름다운 집을 뭇사는 대단히 감탄했으나 그때 그가 생각한 것은 수사가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뭇사는 돌아오기 전에 보낸 어떤 편지 속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주께 찬미할지어다. 그리고 마호멧트 위에 천주의 축복이 있기를
전략
나의 친구이며 모든 친구들 중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예수의 하인에게 군주(술탄) 뭇사 벤아마스토아느는 존엄한 천주의 은총과 그의 축복이 있을 것을 원한다.…
혜택을 입은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지금 빠리에서 돌아온 길이다. 빠리 당국은 우리에게 만족했다. 나는 그대의 누이동생을 만났다. 그리고 그 여인집에서 2일간 체재했다. 또 의제라고 하는 사람도 만나서 그들의 정원이라든가 집을 구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빈자와 같이 「타만라셋트」에 있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그대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들려 주겠다…잘 있거라.』
샤르르 수사는 귀밑까지 붉어졌을 것이다. 1910년에 그의 주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수개월동안에 유브랑 신부와 게랑 주교가 연달아서 돌아가신 것이다. 또 라페리이느는 프랑스로 소환되는 그뒤를 파인 지휘관이 이었다. 「타만라셋트」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은둔소가 책으로 혼잡스러워서 신부는 그것을 길다랗게 증축했다.
『경작은 증가하고 있다. 약간이라도 여유있는 투아레그인은 모두 전지(田地)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들은 자기 자신이 경작하지 않고 「리디캘트」의 농민 혹은 흑인들에게 경작시키고 있다.
일을 감독한다든가 수확하는 것 등은 「투아레그」가 하지만 괭이를 손에 잡는 것을 싫어하고 이와같은 지방에 자기 손으로 경작하는 수도자가 살러 온다면 그것은 커다란 효과를 가져옴에 틀림이 없다.』
1911년 1월에 신부는 또다시 출발했다. 그는 전과 다름없이 「베니 아베스」를 방문하였으며 뒤이어 유브랑 신부가 돌아가신 후의 자기의 지도신부인 보아야아르 신부가 계신 「메송까레」를 방문했다.
또 빠리에서 잠시동안 가족을 방문했다. (리용)에서 그는 크로제 신부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신부가 자기단체를 위해서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최후로 본네 주교와 다시 만난 후 그는 1911년 9월 3일 「타만라셋트」로 돌아왔다.